노트북/2019년

'파친코' - 이 민진

수행화 2019. 2. 6. 17:57

 

 

재미 작가 이 민진은 나에게 낯선 작가는 아니다. 신문 칼럼을 통하여 그녀의 프로필과 글을 접한 것이 오래전이고, 당시의 글들은 나에게 신선한 잔상을 남기고 있어서 새 소설 출간이 반가웠다. 7살에 부모님의 이민으로 미국, 뉴욕에 정착해 성장했고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조지타운대 로스쿨을 거쳐 변호사가 되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소설을 썼다. 장편소설 '파친코'는 2017년 전미 베스트 도서 10선에 오르며 주목을 받았다. '파친코'는 1910년, 즉 한일합병의 해로부터 1989년에 이르는 격동의 우리 근세를 배경으로, 재일 동포 4대가 살아 낸 고난과 애환의 이야기이다. 

소설은 1910년 부산 영도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양진의 부모는 지독한 가난 때문에 딸을 언청이 훈이에게 시집보낸다. 훈이는 장애를 가졌으나 따뜻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이 둘은 정상적인 아이 선자를 낳아 지극한 사랑으로 키운다. 하숙집을 운영하며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로 딸을 바라보던 훈이는 선자가 열세 살 되던 겨울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양진은 선자를 키우며 하숙집을 잘 꾸려 나갔다. 

이때 평양에서 백 이삭 목사가 오사카의 형님댁으로 갈 계획으로 이 하숙집에 잠시 묵게 된다. 그러나 무리한 여행길에 지친 그는 결핵증세가 심각해져 쓰러졌고, 양진과 선자 모녀의 지극한 간호를 받아 회복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오사까와 부산을 오가며 생선 중매상을 하는 한수라는 인물이 어린 선자를 유혹한다. 한수는 일본에 처와 자식을 두고, 선자를 현지처로 삼고 싶어 하나 선자는 임신 중임에도 거절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엄마는 모범 손님 이삭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상의한다. 잘 교육받은 지성적인 이삭은 선자를 구원한다.

휴머니스트 이삭은 자기가 선자와 결혼하고, 일본으로 함께 건너가서, 출생하는 선자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입적하면 되겠다고 제안한다. 이를 받아들여 선자와 일본으로 떠난다. 하지만 오사카 형님의 일본 생활은 몹시 빈한했고, 이삭은 작은 교회에서 목회자로 일하게 된다.

선자는 아들을 낳아 노아라 이름 지었으며, 이후 선자와 이삭 사이의 아들 모자수가 태어난다. 이삭은 신사 참배 문제로 사상을 의심받아 투옥되고, 선자와 동서는 김치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며 생계를 도운다. 곧 큰 식당의 일자리가 주어져 생활은 조금씩 펴져 나가나 옥고에 시달리다 출소한 이삭은 죽음을 맞게 된다. 선자는 절망을 딛고 가족을 책임지며 더욱 강인져간다. 이 과정을 한수는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선자 모르게 선자 가족에게 도움을 준다.

노아는 성을 준 아버지 이삭과 여러모로 닮아, 총명하고 자존심 강한 아이로 자란다. 일본인 가게에서 경리 일을 하면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다. 동생 모자수는 정의로우나 다혈질이어서 가끔 말썽을 부리지만 형제는 서로 깊이 사랑한다. 모자수는 대학을 포기하고 파친코 게임장에서 일을 시작하더니 사업수완이 있어 곧 파친코 게임장 몇을 단독 운영하게 되어 부를 쌓아갔고, 결혼하여 솔로몬을 낳는다. 

노아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도쿄에서 어려움 없이 학업에 열중하고 후원하는 한국인 아저씨와 가끔 식사를 하곤 한다. 그러나 그 후원자가 한수, 즉 자기 생부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후 학교를 자퇴하고 잠적한다. 노아는 홀로 타지에서 일자리를 찾다 손쉬운 파친코 게임장에서 일하게 됐고 한수의 돈을 갚아 나간다.

노아는 가족이 찾지 못하게 개명까지 해가며 완벽하게 절연한다. 일본인 여자와 결혼하여 4남매를 두고 16년째 집을 찾지 않고 살아간다. 백방으로 아들을 찾던 선자는 마침내 노아를 만났으나, 다음 날 노아는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모자수의 사업은 번창했고, 아들 솔로몬을 좋은 환경에서 교육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외국인 학교에 보내고 이어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부모의 꿈에 부응하듯 솔로몬은 콜롬비아 대학을 마치고 유명 투자 회사에 취업하여 일본으로 금의 환향한다. 하지만 솔로몬은 조선인이라는 문제로 부당해고 당하는 일로 좌절하고 한계를 느껴 아버지 파친코 게임장 사업을 물려받으려 한다. 

"역사는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 p.11 >

능력을 발휘하며 승승장구 일본사회에 뿌리내리려던 노아의 절망이나 일본 사회의 엘리트로서 출중한 교육을 받았으나 차별 받고 좌절하는 솔로몬도 선자의 고통이다.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해방이라는 혼돈의 시대를선자 가족은 기독교적인 신앙심으로 헤쳐 나간다.


납덩이 얹은 듯 명치끝까지 차오르는 답답함은 페이지를 넘기면서 무거워져만 간다. 해피엔딩의 기대가 없는 슬픈 다큐를 보는 것 같다. 두꺼운 옷에 가려 잊고 살아온 화상자국을 헤집어 바라보는 아뜩한 아픔이 있다. 선자는 우리 조모, 어머니들의 초상 같다, 

영도의 소박한 한 소녀가 살아 내는 시간과 공간의 이야기는 장대한 파노라마 영상과도 같다. 박 경리의 토지 속으로 들어가듯, 톨스토이의 시대적 연민심을 바라보듯이 읽어 나가게 된다. 작가가 30년에 걸쳐 이 책을 썼다는 말에 모든 독자들은 숙연해질 것이다. 작가는 일본계 남편의 직장을 따라 일본에서 4년 간 생활하면서 국외 거주자의 삶, 국제 경제, 야쿠자, 식민지 시절의 기독교, 정치 문제, 이민, 부동산, 파친코 산업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했다고 한다. 위기의 순간에 선자를 구원하는 이삭의 인간적인 사랑이나 선자의 의지처가 되어 주는 동서의 형제애가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우리가 정이 많은 조선의 자손이라서인가 한다. 

 '이 민진'씨가 쓴 "백 번을 거절당해 봐"라는 제목의 칼럼 하나로 나는 그 이름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명문대를 나온 변호사로서 자신을 믿었을 그녀는 많은 글을 써서 헤아릴 수 없이 숱한 출판사에 보냈다고 한다.그러나 돌아오는 건 번번이 거절의 답장뿐. 자존감에 크게 상처를 입고 끓어오르는 분노로 포기의 유혹에 빠져들 무렵 언니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말했다. "백 번을 거절당해 봐", 백번을 거절당하다 보면 한두 번은 걸려들지 않겠느냐는 그 말이 자기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진정시켰고 전의를 다지게 했으며 마침내 작가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자기 경험을 말하는 글이었다. 좌절하는 우리의 젊은이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민자 가정에서 훌륭하게 자라서, 이제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기념비적인 장편소설을 세상에 내 놓아 크게 관심을 끌어내는 작금에 이르기까지의 노고와 크나 큰 도전에 더 없는 존경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