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9년

새벽의 약속 - 로맹가리

수행화 2019. 2. 28. 00:35

로맹가리의 자전적 소설, '새벽의 약속'은 이렇게 시작한다. 

"끝났다. 빅서 해안은 텅 비어 있고, 나는 넘어진 바로 그 자리에 누운 채로이다. 바다 안개가 사물들을 부드럽게 만들고 있다. 지평선에는 돛대 하나 보이지 않고, 내 앞에 바위 위엔 수천마리 새들이 있다. 다른 바위엔 물개가 있다. 아비 물개는 지치지도 않고 파도 위로 솟아 오른다......마흔 네살에 나는 아직도 어떤 본질적인 애정을 꿈꾸는 것이다.  <p. 9>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이것이 전부. 이제 곧 해안을 떠나야만 한다. 너무 오랫동안 바닷소리를 들으며 그곳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나는 조금만 더 귀를 귀울이며 그대로 있어보려 한다. 항상 금방이라도 대양이 내게 하는 말을 알아 들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듣는다.....아직도 내겐 그런 호기심이 남아 있다. 해안이 빌수록 내겐 항상 더욱 가득한 것같다, ......나는 살아 냈다."  <P. 414>



'인생의 새벽에 한 자기와의 약속, 어머니에게 반드시 영광을 안겨 드리리라는 약속을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하고 싶어 이 글을 썼다고 작가는 말한다. 글을 마쳤고, 탈진한듯 긴 해변에 누워 18년 전에 타계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에 깊이 공감하며 책을 덮게 된다. 특히 아름다운 문체는 감명의 여운을 오래 가게 할 것같은 책이라 해야겠다.   


로맹가리는 1914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인으로 태어났고, 폴란드를 거쳐 프랑스 니스에 정착한 유태계의 프랑스인이다. 미혼모이며 난민의 신분으로 가시밭길이 예고된 삶이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꿈을 위해 열렬히 살아간다. 아들은 미래에 위대한 예술가가 될 것이며, 프랑스 정부의 훈장을 받을 것이며, 프랑스 대사가 될 것이라는 다소 황당한 말은 너무도 확고한 신념이라 어머니의 종교가 되어 있었다. 그 어머니로부터 각별하고 유난한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한다.  

파리 법과 대학에 입학했으며, 공쿠르 상을 받고 30권이 넘는 책을 내며 엄청난 명성을 얻은 작가가 되었으며, 프랑스 군으로 2차 대전에 참전하여 공군 조종사로 전공을 인정 받아 1941년에 드 골 장군으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직접 수여 받기도 했다. 그리고 종전 직후 불가리아와 스위스에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으니, 어머니가 마련한 미래의 그림은 그대로 현실이 되어 간 것이다.  



"파도를 굽어보며 나는 지난 날에서 한아름씩 건져 내었다. 예전에 주고 받았던 이야기의 조각들, 천번이나 들었던 말들, 내 눈 속에 남아 있는 모습들, 몸짓들, 어머니가 손수 짠 뒤 한사코 매달려 있던 빛의 그물, 어머니의 일상을 관통하는 그 근본적인 주제들을."
 


"내가 그토록 애를 써서 치장하였던 가짜 남성다움이며, 허세며 냉혹함 따위의 싸구려 훈장들이 발 아래로 떨어졌다.…….나는 팔로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고서, 어머니를 위해 내가 벌이려고 하는 모든 투쟁들을, 내가 내 인생의 새벽에 나 자신과 맺은 약속을 생각하였다. 어머니 말이 다 옳았던 것이 되게끔 만들리라. 어머니의 희생에 의미를 주리라. 저들과 당당히 세계의 소유권을 두고 겨루어 이긴 다음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는 약속을 나는 걸음마를 할 때부터 저들의 권능과 잔인함을 알아보도록 너무도 단단히 배웠던 것이다.”  <P. 13>



그토록 어려서, 그토록 일찍, 그토록 사랑 받는다는것은 좋지 못한 일이다. 나쁜 버릇을 들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지나치게 요구하고 바라보고 갈망하고 기다린다.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인생의 그 여명기에, 지키지 않을 약속을 당신에게 주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죽는 날가지 찬밥을 먹어야 한다, ....여명의 첫 빛 속에서 당신은 사랑에 대해 압축된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세세한 자료들을 잔뜩 머릿 속에 넣고 있다. 그리하여 어디를 가도 비교라는 독을 품고 다니면서 전에 한번 받았던 것을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한다.  <P. 37>



"잠정적으로 내가 이런 인물이건 저런 인물이건 하등의 중요성도 없었으니, 왜냐하면 나는 내가 현기증 날 만큼 높은 정상이 약속된 사람인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나는 그 정상에서 그 모든 것의 보상으로 어머니 머리 위에 내 월게수를 비처럼 쏟아지게 할 것이었으므로," <p. 46> 

  


나는 내가 그 이외에 다른 어떤 사명도 갖고 있지 않음을, 내가 어떤 점에선 대리인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인간의 운명을 주재하는 알 수 없지만 공정한 힘이. 희생과 헌신의 삶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천칭의 이 편 접시 위에 나를 던졌다는 것을 항상 알고 있었으므로ㅡ 나는 인생의 가장 어둡고 구석진 곳에 숨겨진 은밀하고 희망적인 논리를 믿고 있었다. 나는 세상을 신용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부서진 얼굴을 볼 때마다 내 운명에 대한 놀라운 신뢰가 내 가슴속에 자라남을 느꼈다. 전쟁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나는 항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느낌을 가지고 위험과 대면하였다. 어떤 일도 내게 일어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어머니의 해피엔드이므로, 인간이 절망적으로 세계에 부과하려 하는 천칭의 균형 이론을 통해 나는 항상 자신을 어머니의 승리로 보았다.

그 신념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것은 어머니가 아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당신의 삶과 희망의 유일한 근거가 된 그 아들에게 품어온 신앙을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으리라. <P. 46>



더럽고 냄새 나는 속물들아! 감히 너희들이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줄이나 아는 게야? 내 아들은 프랑스 대사가 될 사람이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을 것이고, 위대한 극작가가 될 거란 말이야. 입센,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될 거라고! 내 아들은………” <P. 50> 


내 아들은 런던식으로 차려입고 살 거야!”



어머니는 아들의 가치 있는 미래를 위해 많은 일을 한다. 감을 받아서 모자를 만들어 귀부인에게 파는 일을 시작으로 미용실 골방에서 여자들 화장 해 주는 일, 고급 개들의 미용을 해 주는 일, 호화로운 집을 방문해 보석을 파는 일, 호텔의 조그만 진열장을 얻어 잡동사니를 파는 일, 그리고 야채 도매 동업, 부동산 소개업….생존을 위해, 아들의 식탁에 내 놓을 스테이크를 위해 어머니는 끝 없이 직업을 구하고 노동에 몸을 던진다. 


현실의 가난과 모멸 속에서도 자존감을 잃지 않으면서, 아들을 사교적인 신사로 만들기 위한 어머니의 작업은 지칠 줄 모른다.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폴카와 왈츠를 가르치며 재능을 찾으려 애썼고, 열 여덟 살에는 마술을 배웠고, 라틴어와 독일어를 열심히 배웠으며 검술, 총술까지 익혀가며 아들의 미래에 대비한다.  

내가 내 미래에 익숙해지는 것을 돕기 위해 어머니는 장에 가면 골동품 상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지고한 장소들을 담은 낡은 그림엽서를 사오곤 하였다."


어머니의 고통에 어서 보상해 드리려는 마음에 아들은 독서광이 되어 갔으며 일찌기 많은 글을 쓰며 작가의 길에 들어선다. 

어서 빨리 불후의 명작을 써야겠다는 것을 느꼈다. 나를 전무후무한 톨스토이로 만들어, 즉시 어머니의 고생을 보상해 주고, 어머니 일생에 왕관을 가져다 줄 수 있게 할 걸작을” <P. 180>



프랑스군으로 참전 중에도 아들의 글쓰기는 계속 됐으며, 어머니는 사랑이 가득한 지지의 편지를 보낸다. 강인하고 용감한 어머니의 성품은 어느듯 아들에게로 깃들어 용맹하게 전투에 임한다. 빛나는 미래가 약속된 아들에게는 결코 불운한 일이 생길 수 없다는 어머니의 확신에 찬 말씀이 환상처럼 온 몸에 스며들어 절망을 막아 주었고, 아들을 절망불능증에 들게 한 것이다. 



"레지옹 도뇌르와 무공훈장과 더불어 대여섯개의 메달을 거슴에 달고, 대위 장식줄을 늘어뜨리고, 신문 기사를 오린 것을 접어 넣고, 외교관 임명 서류를 넣고, 마침내 세상이 믿을 만함을 증명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운명에 형태와 의미를 부여한 뒤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승리하여 돌아 온 아들을 자랑이 가득한 몸짓으로 팔 벌려 맞이할 어머니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머니는 지병으로 이미 삼년 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럼 자기가 받은 어머니의 응원 편지는 무엇이었다는 말인가?  죽기 앞선 몇달 동안 어머니는 250 통의 편지를 썼고, 스위스의 친구를 통해 일정 기간 아들에게 발송되게 해 두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아들의 절망을 원치 않았고, 승리의 전리품을 안고 어머니를 찾고자 하는 아들의 열망을 끝까지 지탱해 주려 노력한 것이다.



가슴 벅찬 해후의 순간을 극단의 슬픔이 덮어버리는 가혹한 장면에 우리 모두는 절망하게 된다. 자식이 도리를 하고자 할 때까지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을 곱씹으며 애석해 하게 된다.

맹목적으로 보이는 어머니의 일관된 신념은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빛이며, 기적을 향해 가는 마법이 아니었나 싶다.
"너는 최고가 될 것이다' 이 멋진 말이 발한 최면의 힘은 아들을 자기애가 강하고 성취욕에 열 뜬 아이로 자라게 했다 할 것이다. 예술적인 재능의 원천이 연극 배우 출신의 어머니에 있었고, 가난은 재능을 끌어 올리는 에너지의 원천이었다고 한다지만, 아들을 드높은 세계로 끌어 올리려는 어머니의 열망과 헌신은 언제나 배경에 있는 것을 보게된다. 드라마틱하고 교훈적이다.   


가난한 이민자 소년이 꿈꾸던 성공에 이르는 극적인 인생을 파노라마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족한 소설이다. 그에 못지 않게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섬세하고도 수준 높은 문장들이다. 글 한 줄 한 줄에 강렬한 자력이 있어 페이지를 허투루 넘길 수 없게 하는, 말하자면 교감하고 소화해 가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게하는 쉽지 않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신용을 잃지 않았다. 나는 내 약속을 지켰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나는 성심을 다하여 프랑스에 봉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작은 증명 사진을 빼면 그것이 내 어머니로부터 받은 전부이기 때문에, 또 나는 책들을 쓰고 있고, 외교관 생활을 했고, 약속대로 영국식으로 재단한 옷을 입는다. 영국식 재단법을 끔찍이 싫어하면서도. 나는 인류에게 크나큰 봉사를 하기조차 하였다.  <P. 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