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9년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

수행화 2019. 4. 16. 12:02

아무런 정보 없이, 어떤 선입견도 갖지 않고 책을 읽는 것도 신선한 재미가 있다는 걸 알았다. 책을 사랑하는 이의 추천이라면 앞 뒤 잴 일이 없는 것이다.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 주인공 아서는 소설 '오베라는 남자'에서 오베의 캐릭터와 살짝 닮은듯도 하고, 장소를 옮겨가며 에피소드를 쌓아간다는 점에서 '창문 넘어 도망 친 100세 노인' 의 여정을 연상케 하여 낯 익은듯, 독특한 재미를 주었다.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긴장감이 섬세한 문장들과 밀고 당기며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어 
잘 만들어진 가족 영화 한편 본 느낌도 든다. 

 

아서 페퍼는 은퇴한 열쇠 수리공이다. 아내 미리엄과 아들, 딸과 40년 간 잔잔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누렸고 1년 전 아내를 잃었다. 아내가 세상의 전부인양 살아 온 그는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기도 싫고 아내의 자취를 걷어낼 수도 없어 유품 정리를 차마 못하다가 아내가 떠난 1년이 된 날 정리를 시작한다. 

 

"그는 고객들에게 문에 박아 넣는 신형 자물쇠를 선보이면서 빗장 걸쇠, 레버에 대해 설명하길 좋아했다. 자물쇠에는 마음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자물쇠는 단단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자물쇠는 우리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켜 주었다. 차에서 항상기름 냄새가 나는 게 좋았고, 상점에서 고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P. 27>

 

"바쁘게 지내는 게 좋았다. 그래야 슬픔에 잠길 시간이 없을테니까. 어쨌던 그게 아서가 스스로에게 타이른 말이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일상의 일들을 처리했고, 그럭저럭 견뎠고 잘 버텼다. 그러다가 복도에 걸려 있는 초록색 포푸리 잎사귀, 저장실에 있는 미리엄의 진흙 묻은 신발, 욕실 선반에 놓인 핸드크림을 보는 순간 , 산사태가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작고 하찮은 물건들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 P. 40>

 

아내를 보낸 후 상실감을 어쩌지 못해 칩거에 가까운 생활을 하였고, 아침마다 변함 없이 문을 두드리며 안녕을 첵크하고 먹거리도 건네 주는 이웃, 버나뎃의 우정도 슬픔을 벗어나게 하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유품 정리를 해 나가던 중 아내의 부츠 안에 든 하트 모양의 작은 상자를 발견한다. 상자 안에는 여덟개의 참을 매달고 있는 황금 팔찌가 보관돼 있었다. 이상한 것은 아내가 착용한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보석이 박힌 코끼리 참, 작은 진주알을 다섯 빛깔 보석이 둘러 싼 꽃모양 참, 물감과 붓 형태의 에나멜 점들이 박혀 있는 팔레트 참, 뾰족한 황금 이빨을 드러낸 호랑이 참, 책, 골무, 하트, 그리고 반지 참을 매달고 있는 묵직한 팔찌는 궁금증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물건이었다. 

 

참에 대한 의문의 첫 단서는 코기리에 새겨진 암호같은 숫자였고, 이 숫자는 아서를 집 밖으로 이끌었고 여행을 계획하게 했다. 코끼리 참에 새겨진 숫자는 놀랍게도 아내가 과거에 인도에 산 적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고, 이후 영국 배스의 그레이스 톡 영지로 떠났다는 사실까지 듣게 된다.
그레이스 톡을 시작으로 아내의 과거 시간을 따라 길을 나선다. 우여곡절 끝에 쇠락의 냄새가 풍기는 그레이스 톡 영지에 들어갔으며, 호랑이를 사육하는 현장을 보았고 호랑이 참의 의문이 풀려 간다. 1963년 당시 영주는 애인, 친구, 친지들에게 정표로 호랑이 참을 명함처럼 뿌렸다는 사실을 들었고, 아내가 이곳 할렘에 거주했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했다.
이어서 소설가의 런던 집을 찾아냈고, 책모양 참은 소설가와 아내와의 인연을 말해 주었다. 꽃 팬던트는 이름이 펄인 장모가 아내에게 물려 준 것이라는 것으로 의문은 풀려가고 있었으나 아내가 자기에게 과거의 일을 말하지 않은 점은 결코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토록 헌신적이고 사랑스런 아내였는데 말이다. 이후 딸의 도움으로 어머니의 편지 상자에서 황금 골무의 힌트를 얻어 파리로 떠난다.
골무참은 파리에서 의상실을 운영하는 아내 친구에게서, 팔레트 참은 한 때 아내와 연인관계였던 화가로 부터였다니....

 

아서는 아내를 그리워 하며 슬픔에 잠긴 나며지 유품 정리도 못하고 있던 홀아비에서 불과 몇 주만에 의심에 가득찬 남자가 되어 버렸다. 팔찌는 아내의 비밀스런 추억이었고 아서에게 엄청난 상처를 입힌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하트 참은 호주에 사는 아들이 어머니께 선물해 준 것이어서 참은 과거에서 현실로 이어지며 끝맺음을 밝게 한다. 


 매사가 정확한 남자, 예측이 가능한 남자, 한 시간 후의 일도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남자, 아서에게 참에 얽힌 아내의 과거는 충격이라는 표현으로는 크게 부족하지만, 살며 사랑하며 보아 온 아내를 떠올리며 아내의 과거를 이해하고 어이 없는 마음을 거두게 된다. 아내의 진정성을 믿기로 한다. 이 무채색의 남편에 충실할 것이며, 결코 과거를 뒤돌아 보지 않을 것이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 했을 아내의 의지라 믿은 것이다. 아내는 그렇게 사랑으로 가정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참의 비밀을 알고자 떠난 여행은 결과적으로 아서의 일상에 크나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세상 속으로 나갔으며, 다양한 양상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숱한 고통과 애환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부대끼며 알게 되었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건들이 아서의 내면에 일으킨 바람은 타인에 대한 연민심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연민하고 돕고 싶은 마음은 밝은 미래로 향하는 발돋움이다. 참팔지의 의문을 풀어 낸 댓가가 크다. 참 팔찌의 미스터리를 풀지 않고 의심을 품고 내버려 뒀다면 결코 갖지 못했을 심경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오해가 쌓인 가족 간의 문제도 보다 적극적으로, 얽힌 실 풀어가듯 풀어가며 유대감을 복원하리라는 마음도 가진다. 공감하고 이해하던 아서의 마음이 더 나아가 남을 돕고자 하는 좀 더 고등한 인간미까지 갖고자하는 것은 어쩌면 참팔찌를 통하여 아내가 보낸 메세지인가 한다.

 

"카페에서 낯선 사람에게 인간관계에 대한 조언을 했고, 그 조언이 그가 그 자신를 두고 생각하는 것처럼 한심한 노인네가 하는 소리 같진 않았다, 과거의 연적을 만났고 무심히 돌아설 수도 있었지만 세바스천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약물 중독 전력이 있는 청년과 청년의 개에게 보여준 열린 마음과 포용력에 스스로 놀랐다. 그 자신조차 알지 못햇던 것들이었다 아서는 스스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강하고 더 속 깊은 사람이었고, 그는 자신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발견이 마음에 들었다." <P. 226>

 

"마치 황무지에 홀로 버려진 씨앗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씨앗은 역경을 딛고 단단한 땅을 밀어내며 마침내 싹을 튀웠다. 초록색 싹이 움트고 있었다. 그는 그 싹을 키우고 싶었다. 언젠가 프레더리카 잎이 시들어 가장자기라 갈색으로 변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물을 주고 애정을 주었다 이제 그는 그 자신에게도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용기가 생겼다.    < P. 228 >

 

"아서는 기억이라는 것이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변형되고 왜곡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기억이 마음과 기분의 명령에 따라 잊히거나 복원되고, 강화되거거나 흐려진다. 아서는 참을 준 사람들에게 미리엄이 어떤 마음을 품었느지 생각하며 온갖 감정들을 빚어 냈다, 그는 미리엄의 마음이 어땠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알아 낼 수 가 없었다. 그러나 미리엄이 그를 사랑했다는 것, 댄과 루시가 그를 사랑했다는 것, 살아갈 이유가 충분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패드라 패트릭' 이라는 작가의 이름이 나에게는 생소하나, 그녀는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왕성하게 활동해 왔다고 하고, 이 작품이 그녀의 첫 장편 소설이라고 하는데 대단한 내공의 작가라는 걸 알아봤다. 영국으로 프랑스로 그림책을 넘기듯 넘어가면서 재미를 더하는데 아름다운 표현들이 자꾸 시선을 붙잡아 즐거웠다.

결혼이라는 분수령을 깃점으로 인생은 결혼 전과 후로 엄연히 양분된다 해도 좋을 것이다. 과거는 산 저 너머의 추억이 본질이며, 현재는 산 이쪽의 현실이 본질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과거는 추억의 재료로서 더 나은 현재를, 또 더 나아가 굳건한 미래를 바라보게 하는 가르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현명한 자는 두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는 부처님 경전 말씀도 과거에서 가르침을 찾으라는 의미인 것이다. 
아내의 과거에도 가르침은 있다. 
신뢰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은 현재를 사는 지혜로서 마음의 평화를 이끌어 내고 화합의 아름다움은 인생을 밝게 인도한다. 이야기의 방점이 여기에 있지 싶다. 재미도 재미라지만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볼거리도 쏠쏠할 것같다. 영화로 만들어질지 알 수는 없지만.....
책을 덮으니 책소개의 반가움과 고마움이 더욱 새삼스럽다. '패드라 패트릭'이라는 작가를 알아 보았고, 격하지 않으며 섬세한 글을 읽는 내내 행복했기 때문이다. 

 

책을 다급하게 읽어젖히고 벚꽃 구경하겠다고 여행한 것이 며칠 몸살을 불렀다. 그 사이 아파트 뜰에도, 가로수에도 벚꽃구름이 쏟아졌다. 바람결 따라 꽃소식이 올라온 것이다. 행복의 파랑새 찾아 먼길 돌아다니다 앞 뜰에서 파랑새 만난 느낌이 이런 것일테다. 마을 벚꽃길을 눈 부셔하며 오락가락 배회하니 마음까지 부셔진다. 발치에 드리운 부드러운 꽃그늘도 다시 없게 고와 보인다. '절세미인'이라는 꽃말을 누가 붙였단 말인가! 봄을 깨우는 이 해사한 꽃구름에다.....

소나기처럼 봐 넘긴 책으로 피로해진 내 눈에 호사를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