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9년

'후회 병동'

수행화 2019. 10. 24. 22:36

'후회병동'은 일본작가 '카키아 미우'쓴 소설이다. 죽음을 앞 둔 환자들이 좀 더 평온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게 도우게 되는 의사의 일인칭 소설이다. 비유와 유머가 있어 수월하게 읽히나 그 의미는 두루 무겁게 다가온다.

 

 

"간다가와 내과에서 근무하지 곧 10년이 된다. 죽음을 앞둔 환자가 많은 이곳에서 이미 500명 가까운 사람의 임종을 지켜봐 왔다. 그것만으로도 경험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환자 앞에서는 아직도 긴장하고 책임이라는 무게에 짓눌리다 못해 급기야 공포로 바뀌는 때마저 있다."   < P. 20>

 

 

여의사 로미코는 열심히 지식을 쌓고, 신기술을 익혀 환자의 병을 치료하고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 의사의 의무라 여기며 열심히 환자를 돌보아 왔지만 환자들은 별 호감을 갖지 않는다. 딱히 나쁜 표현은 아니지만 눈치 없는 말을 하는 등 실수가 잦아 동료 의사들의 걱정까지 사게되니 은근히 괴롭고 울쩍해지는 일이 잦다. 그런 어느날 정원에서 청진기를 하나 줍게 된다. 주인을 찾지 못해 자기에게 돌아 온 청진기가 실은 놀라운 마법의 물건이었다. 청진기를 환자 가슴에 대면 속마음의 소리가 훤히 들리는 것이었다. 죽음에 이르러 미처 다하지 못한 일이나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후회의 말들을 듣게 되면서 환자를 이해하고 마음을 열어 도우게 된다.

 

 

청진기를 통하여 환자는 과거의 문으로 거슬러 넘어가 짧은 무의식 상태에서 원하던 과거 어느 순간을 압축하여 살아보는 것이다. 환자의 후회를 dream, family, marriage, friend로 나누면서 우리 인생의 보편적인 문제를 접근해 본다.

 

 

유명 배우의 딸 '자기라 사토코'는 배우 지망생이었으나 꿈을 접고 평범한 인생을 살다 서른 셋의 나이에 죽음을 맞아야했다. 꿈을 이루지 못한 후회는 엄마에 대한 깊은 원망으로 남게 됐다. 엄마는 철저히 자신의 일과 가족을 분리 시켰고, 심지어 딸은 존재하지 않은듯 세상의 관심 밖에서 자라게 했다. 엄마의 의도대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딸은 암을 얻으니  "이렇게 일찍 죽을 줄 알았으면, 내가 하고 싶었던 인생을 살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크지 않을 수 없다.

의사 로미꼬의 청진기는 사토코를 과거, 학창 시절로 돌아가 보게 한다. 청소년 배우로 데뷔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배우의 일상을 살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알려진 배우라는 삶의 고단함이 막중한 걸 알게된다. 남자 배역의 팬들로부터 심신의 공격을 받아야했고, 큰 맘 먹고 외투 하나를 샀더니 고등학생이라고 볼 수 없는 초호화 쇼핑을 했다는 과장된 보도가 나도는 등 갖은 루머에 시달리게 되면서 마침내 깨닫게 된다. 살아가면서 나를 좋아하는 사람 100명이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도 100명이 있다는 걸. 과거 원하던 삶의 고충에서 현실로 돌아 오면서 현재의 평범한 삶이 주는 자유와 행복에 감사하게 된다. 엄마의 진정한 사랑을 이해하며 후회를 걷고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는 dream편.

 

 

입사 10년 차의 37살 남성 휴가 게이치는 일의 성취에 만족하며 열심히 회사 생활을 한다. 자기 능력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걸 입증해 보이려 야근을 마다 않고 일하며 살아가다 말기암 판정을 받게된다. 역시 청진기가 열어 준 과거의 문을 지나 자신의 지난 날의 일상들을 바라 본다. 일만 생각하고 일에서만 만족을 구하던 자신은 가족에게 전혀 마음을 쓰지 않은 것이다. 자기의 무관심 속에서 서툰 육아와 가사 노동으로 힘 들어 하는 아내가 느꼈을 고독같은 건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단 한번 뿐인 인생에 못다한 일이 너무 많았다는 후회에 시달린다family편.

 

 

결혼하지 않은 딸을 남겨두고 가야 하는 엄마, 유카무라 지토세도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딸이 좋아하던 사람이 격에 맞지 않아 결혼을 극구 말렸고, 결국 딸은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엄마로서 딸의 행복을 빼았았다는 죄책감과 후회로 괴로운 투병생활을 한다. 청진기를 통하여 후회하지 않을 과거로 돌아가 완강한 반대를 접고 딸을 사랑하던 사람과 결혼 시킨다. 그러나 능력 없는 남편으로 생활고가 지난하고 수준 맞지 않은 시댁 식구들로 하여 고통스런 삶을 살면서 딸은 웃음을 잃고 초췌해져 가는 것에 가슴 아파하는 자신을 보고 현실로 돌아 온다. 과거 여행에서 깨어나면서 후회하던 일에서 놓여나 편안하게 숨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는 marriage편.

 

 

회사원 '야에가시 고지'는 중학생 시절 좋하하던 여학생의 불의를 보고도 눈을 감았다. 그 뿐 아니라 친구가 그 잘못으로누명을 뒤집어 썼는데도 구명해 주기는 커녕 곤경에 처한 친구를 멀리해 버렸다. 그 일로 친구는 인생에서 불이익을 받아 신산하게 살아야 했고, 자기는 그 여학생과 결혼까지 한 것이다.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아 그때의 배신에 괴로워 한다. 역시 의사 루미코의 청진기를 통하여 과거를 뒤돌아 가본다. 믿기 어려운 아내와 장모님의 추악한 모습을 보게 되어 아연실색한다. 그사이 신약 임상시험 치료로 그는 암이 크게 호전됐으며 그간 멀리 했던 친구를 만나 화해하고 우정을 회복한다. 반면 자신의 죽음 이후를 설계하던 아내와 장모님을 경계하게 되었다는 friend편.

 

 

죽어보지 않아 저승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전해 들어 알고, 책 속에서 활자로 체험하며 미루어 짐작을 한다. 후회의 정이라는 것은 강한 부정적 에너지로 마음의 심연에 깔려 있다가 최후의 순간에 이른 사람에게 생생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질긴 감정인가 한다. 죽음이라는 철저히 고독한 길을 까맣게 잊고 사는 까닭에 후회에 대한 정리나 화해같은 건 모르는 일이 되면서 그저 나날을 무심히 살아 가고 있는 것이다. 

 

 

의사 로미코가 사용한 청진기는 마음 치료를 이끄는 신묘한 기구가 되었다. 환자의 후회를 들어주고, 만약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환자와 한 몸이 되어 고민해 주고 머리 써주고 배려해 주게 되면서, 임종 담당 의사로서의 임무를 수정해 갔고, 죽음을 앞 둔 이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에도 가르침이 전해진다. 후회의 마음을 읽어주는 청진기의 치유 능력에 배움이 있는 것이다. 관계에서 오는 후회와 화해하는 시간을 가져서 세상을 좀 더 편안하게 바라 볼 수 있다면 이 소설이 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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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히 보내는 하루가 있다. 시간이 댓가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시간은 내일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내일이 없을 수 있다는 절망, 죽음이라는 현실에 맞닥뜨린다면 그 아뜩한 마음이 어쩌랴 싶다. 관성에 따라 움직이던 일상에 급제동이 걸리고, 마음은 궤도를 사정 없이 벗어나면서 분노, 후회, 원망 등이 한꺼번에 떠밀려 와 고통에 폭파해 버리지 않을가 싶다. 마음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임종이라는 궁극의 순간에는 본능의 지배를 받는다니 두렵기만 하다. 책이 우리에게 일용한 생각거리를 주어 면역력을 키워줄 것만 같아 고맙게 받아들인다.

 

  

"날씨 좋은 날 노천카페에서 읽어보셔요. 가독성이 좋아 이틀이면 읽어요!"

" 예. 카페는 아니어도 햇살 좋은 창가에서 책 잘 읽었답니다. 생을 마감하는 고통을 줄이는 일은 후회를 줄이는 일이군요. 그나저나 나는 책동무가 있어 이 가을 행복합니다" 한참 나이 든 나를 벗 삼아주고 책 추천 메모도 보내주는 아름다운 이에게 마음으로 답변을 보내며 단풍물 올리는 나무들을 바라본다. 후회 없는 오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