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9년

김 영하 '여행의 이유'를 읽고...

수행화 2019. 12. 10. 23:32

김 영하 작가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는 출간 후 꾸준하게 베스트셀러 지위를 유지하여 올해 판매부수 최고를 찍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작가는 영감의 원천을 여행에 두고 있지 않나 싶게 여러 글들에서 여행 에피소드나 독특한 외국살이의 경험들을 쓰고 있어 즐겨 읽곤 했었다. 특히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는 시칠리아 살아보기 쯤 되는 글로서, 현지인의 이웃이 되어 장도 보고 밥도 해 먹는 나날들이 손에 잡히듯 그려져 잔잔한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모두가 모두를 다 아는 정겨운 마을, 시칠리의 평화로운 감상이 잊히지 않고 있어 이번 '여행의 이유' 출간소식을 접하고는 그냥 봐야하는 책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작가는 생각으로 일하는 직업이라 가벼운 머리에 지혜만 담으면 어디에서든 일할 수 있으니, 방랑하기 좋은 직업 조건을 가졌다 하겠다. 일터에 얽매일 까닭이 없는 김 영하 작가도 상하이에서 한 달 가량 머물며 집중적으로 글을 써보리라는 계획으로 상하이 푸둥 공항에 도착했었다는 이야기로 이책의 첫 페이지를 연다. 그런데 한 달 체류는 커녕 상해 시내 입성도 못해보고 하루만에 인천공항으로 추방되는 황당한 경험을 하게됐다고 한다. 중국은 입국비자가 필요한 국가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을 몰랐던 탓에 비자 발급을 받지 않고 입국해서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한국의 내로라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확실한 신분임에도 어쩔 수 없이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린 해프닝에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기억이 소거된 작은 호텔방 순백색 시트 위에 누워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설 에너지가 조금씩 다시 차오르는 기분이 들 때, 그게 단지 기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마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P. 68> 

나는 호텔이 좋다. 

"호텔을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다. 호텔은, 당연한 말이지만, 집이 아니다. 어떻게 다른가? 집은 의무의 공간이다. 언제나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띈다. 설거지, 빨래, 청소같은 즉각 처리 가능한 일도 있고, 큰맘 먹고 언젠가 해치워야 할 해묵은 숙제들도 있다. 집은 일터이기도 하다....."   < P. 63 >

"오래 살아 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가족에게 받은 고통, 내가 그들에게 주었거나 그들로부터 들은 뼈아픈 말들은 가라지지 않고 집 구석구석에 묻어 있다. 집은 안식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상처의 쇼윈도이기도 하다."  < P. 64 >

호텔이 주는 해방감이 좋아서, 호텔에는 기억의 잔재가 없어서, 처리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아서.....누구나 느끼는 사소한 감상들이 왜 작가의 글을 통하면 진리처럼 반짝하니 빛나 보일까? 

 

 

많은 미래학자들은 인터넷 보급으로 세상 살이에 숱한 변화가 올 것이며, 그 일환으로 여행자의 수요도 크게 줄어들 것이라 예상했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방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을테니 굳이 시간과 경비를 쓰며 하는 여행은 시간 낭비가 될 것이라는 이유였다고 한다. 그런데 작금의 상황은 어떠한가? 온갖 종류의 여행정보와 여행다큐들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오히려 여행 욕구가 더 강해져 간다는 것이다. armchair traveler (방구석 여행자)로서 편안한 여행으로 여행욕구가 채워지지 않더라는 점이다. 보다 역동적인 여행, 발품 파는 여행, 호기심을 듬뿍 충족 시켜주는 여행 등 여행의 양상이 다채로워지는 추세로 자가니 지식의 확장에다 촛점을 둔 많은 미래학자들의 예측은 크게 빗나갔다고 하겠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영감을 좇아 여행을 떠난 적은 없지만, 길 위의 날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 P. 82 >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일상으로 돌아 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 생을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 P. 207 >

 

 

여행이란 여행자가 외부 세계에 습격하여 노획물을 잔뜩 짊어지고 약탈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정의하는 글이 마음에 남는다. 여행자가 여행지에서 온 몸으로 보고 느끼며 받아 들인 무형의 경험들을 온전한 노획물로 본 시각이 재미 있고, 맞는 말같기도 하다. '스물 세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고 쓴 서 정주 시인의 시가 문득 떠오른다. 여행이, 바람이 내적 성숙을 안겨준다는 말에 십분 공감이 간다.

 

물 흐르듯 흘리며 읽다가도 툭툭 걸리며 잠깐 생각을 붙잡는 부분들이 있어 마냥 겅중겅중 읽을 수는 없다. 일본인들의 여행에 대한 환상과 동경이 느껴지는 부분에도 잠시 흐름이 늦추어진다. 일본인 여행자들이 유독 파리 여행 중에 호흡곤란이나 현기증을 많이 느끼는 경향이 있고, 이런 증세를 일본의 어느 심리학자가 '파리 증후군'이라 칭했다고 한다.  환상과 현실에 이질감이 생길 때 불편을 느낀 몸이 여러 증세들로 나타나는 모양이다. 파리에 대한 지나친 환상이 증후군이 되기도 한다니...., 하긴 어떤 선임견이나 기대 없이 무심히 마주친 도시가 뜻밖의 매력과 영감을 안겨 주는 경험이 평범한 우리에게도 있으니 역시 여행의 감상은 개인적이고 또 백문이 불여인견이기도 하다 싶다.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낀다.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당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 데이비드 실즈)  P. 64

 

"여행은 분명 시작과 끝이 있다. 설렘과 흥분 속에서 낯선 세계로 들어가고, 그 세계를 천천히 알아가다가, 원래 출발했던 지점으로 안전하게 돌아온다. 독자와 여행자 모두 내면의 변화를 겪는다.  < P. 204 > 

 

여행의 완성은 제자리에 돌아 오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슬픔을 떨궈 보고자 하든, 행복한 시간을 화장해 보려 하든, 일을 위한 여행이든 모든 여행은 돌아올 내 자리를 두고 떠나는 데서 행복이 있다 하겠다. 유랑의 여행은 말 자체로만 낭만이지 않나 하는 옹졸한 나의 생각이 고개를 들고 있다. 유랑은 여행이 아니 것으로.

 

나는 읽고싶은 책 목록처럼, 내 마음의 여행지 위시 리스트를 갖고 있다. 더러 여행을 하며 지워 나가지만 전혀 줄어들지 않으니 실현 계획과 무관하게 목록이 자동 업데이트 되는 모양이다. 여행의 이유, 여행을 해야할 이유는 많고도 많다. 

여행은 그 말을 읊어봄에도 설렘이 있다. 알 수 없는 그 어느 시절부터 소리 없이 잊혀진 설렘이라는 젊은 감정이 타다 남은 재 속의 한 알 빨간 불씨처럼 불현듯 붉어져 온다. 가슴에 뻐근한 통증을 동반하기도 한다. 

 

가방을 꺼내고, 여행지 기후 조건을 따져가며 매일 떨쳐 입고 나갈 옷을 최소한으로 잘 코디해 보는 일도 즐겁고, '달달달...' 여행가방 바퀴 구르는 소리를 경쾌하게 들으며 공항에 들어서면 마음은 이미 창공 높이 날아버린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솟아오르는 순간, 허물처럼 벗어 놓은 내 일상에 안녕을 보내며 곧 다가올 여행지에 마음을 집중하게 된다.

 

낯선 도시의 공기를 마시며 통하지 않는 언어로 소통해 가는 즐거움, 작은 기념품 가게, 허접한 가판대 하나에도 눈길을 보내보는 색깔 있는 시간들....늘 선물처럼 소중하다. 방구석 여행자일 때의 여유로운 관광은 가당치가 않게 여행지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마치 선명한 꿈 한편 꾸었고 깨고보니 인천공항이었다는 비현실성의 현실이기만 하다.

 

누군가 나에게 여행의 이유를 묻는다면 단연 돌아와 홀로 여행을 정리하는 시간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허공으로 흩어져 버릴 기억들을 잘 그러모아 정리 하며 복습 여행을 하고, 사진을 정리하고, 불쾌하거나 기억하기 싫은 일들까지 더부러 묶어 핵심 노트를 간결하게 만들어 블로그에 보관하고 나면 비로소 여행을 끝 낸 일상 속의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무리 짧고 소박하고 시답잖은 여행이라해도 그곳에 늘 배움은 있다. 인내를 배우고 바르고 빠른 판단력도 얻게된다. 작가나 여행전문가들의 내공이야 오죽하랴 싶다. 

 

'미국 메이저 오페라단, 그곳에 우뚝 선 한국인 마에스트라'라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첫 여성 감독직에 오른 지휘자 김 은선씨의 성공을 말하는 글이었고 여성으로서 어려운 지위에 오른 능력에 감탄하면서 읽어 나가는데 인터뷰 도중 한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오랫동안 마음 놓고 몸 누일 집이 생겨서 기쁠 뿐"이고, 또 "야행용 트렁크 3개에 사계절 옷과 악보를 싸들고 365일 호텔을 전전하며 객원으로 지휘를 해 욌는데, 이제 하나의 오케스트라와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행복하다" 고 하는 말이다. 트렁크 3개를 끌고 세계를 누빈 여행이 그녀를 키웠고, 유랑의 세월이 그녀를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는 말같다.

 

정 채봉 작가의 글 중에 "광야로 내 보낸 자식은 콩나무가 되었고 온실로 들여 보낸 자식은 콩나물이 되었다"는 말이 함께 떠오른다. 트렁크를 밀고 광야로 나가 마침내 콩나무가 된 장한 김 은선 씨가 아닐까? 이렇듯 여행은 왕성하게 탐구해야 하고, 타인에 적응하며 인간을 성숙시키고 지혜를 키워주는 경이로운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