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20년

원인이 되는 삶

수행화 2020. 2. 29. 15:14

해 바뀐지 두달, 빳빳한 카렌다에 담겨 배달된 나의 1년 새 시간도 1/6이 벌써 사라졌다. 묵은 달력을 접으며 지난 한 해도 고만고만하지만 나날을 잘 살아 냈다고 자평을 했더랬다. 못다 했던 일들, 미진했던 많은 것들이 어찌 도드라지 않을까마는 부분 부분 너그러이 면죄부를 줘가며 내게 셀프 위로와 셀프 격려를 보내보던 시간이 회상 속의 먼 그날처럼 아득하다. 이렇게 3월을 맞는다.

 

시작도 모르고 끝도 알 수 없이 막연하게 스쳐가는 순간 순간들을 시간으로 개념화한 인류의 지혜는 경탄 그 이상이라는 생각을 한다. 영겁의 부단한 흐름을 잘게 또 잘게 잘라 시간이라 이름 지으며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은 기원은 이집트에 있다고 한다. 인류 발생 초기에 나일강 하구에 정착한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농사에는 주기적으로 오는 홍수의 예측이 필요했다고 한다. 자연의 변화를 살폈고, 별자리를 관측했으며 자연 변화에는 주기가 있고, 서로 일정한 상관 관계가 있음을 터득하면서 시간 개념이 구축되었다는 설이 있다. 시간은 구부러질 줄 모르는 정직하고 곧은 흐름이다. 앞으로 내닫는 동일선상에 있는 시간이지만 2019년을 2020년이라 부르는 것도 이러한 시간의 질서를 따르는 인류 간의 약속인 것이다. 꼬리가 살짝  잘려 아쉬운 달, 2월을 올해는 전례 없이 힘들게 보내면서,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새겨본다.

 

눈 없는 겨울을 보내서일까? 내 멘탈을 잠시 빛나게 해주는 새해의 다짐들이 모양새를 채 갖추기도 전에 1월이 휘리릭 날아가더니, 암울하고도 공포스런 2월을 지금 보듬어 넘기고 있다. 코로나 폐렴이라는 중국 우한발 괴질이 벼락 치듯 날아 들더니, 삽시간에 온 나라를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 넣고 있다. 텅빈 거리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 오가는 풍경은 연출된 영화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바이러스의 공격을 피해 사람들은 서둘러 집으로 숨어 들어야만 하는 일찌기 경험해 보지 못한 날들이 계속된다.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타의에 의해 길어져만 간다. 할 일들을 여유 있게 골라서 하기에 더 없이 좋은 기회이건만 마음이 전혀 따라주질 않는다. 뉴스에 곤두선 신경이 일에 집중을 방해하고 있다.

 

이제 바이러스는 도깨비 시늉으로 지역을 옮겨가며 출몰하기 시작했고, 감염 확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간다는 불안한 뉴스가 집안에 넘실대니 하루가 참으로 길다. 우리의 뇌는 충격적인 일을 오랫동안 기억하면서 시간 흐름을 더디게 느끼게 하고, 일상이 반복되듯 감흥 없이 보내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는 것으로 감각이 인식한다고 한다.  시간이라는 정확한 척도가 사건에 따라 이렇게 개별적이고도 주관적으로 흐른다는 과학이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집중력 떨어지고 일손은 놓고 있는 상황에 시간마저 더디 흐르니, 악순환의 고리를 잡은 것같다. 

 

 많은 토끼는 세 군데 굴을 파 둔다고 했다. 놀며 쉬며 또 위험에 대비해 몸을 숨기기도 할 요량인가 하는데, 굴 셋을 마련하는 지헤와 노력이 가상하다 싶다. 토끼의 작은 머리도 한 일을 하는데, 불편감으로 하루 하루를 꼬깃꼬깃 구겨버려서는 아니될 터, 일상의 리듬을 되찾을 방법을 그러모아 봐야한다. 우선 머릿 속에 뭐든 욱여 넣어야 할 일이다. 모름지기 인간의 뇌는 허기지고 불편해야 일을 하게 된다니, 뇌가 불편을 느끼는 지식 따위를 자꾸 넣어 줘서 일을 하게 만들어 줘야하겠다.

 

나의 하루라는 것이 제 날 숙제하기도 바쁜 학생에 다름이 없다보니, 뇌가 해낸 일의 성과는 늘 비관적이다. 기능이 떨어진 기억력을 부려 가며 하는 일이 오죽하랴만 번번히 실망감으로 서글퍼지는 마음은 어쩌지 못한다. 책을 펼치면 내용은 안 보고 활자만 보고 있지를 않나, 페이지를 다 넘겨도 요점 정리가 안 되지를 않나 할 때 맛보는 낭패감이라니! 기억력도 즐거움 호르몬 분비가 원활할 때 강도가 높아진다고 하니, 모름지기 꾸며서라도 즐거이 상황을 긍정하는 것이 맞을 것같다. 맥 놓고 앉아 있으면서 실속 없이 기대치만 높이며 끓기도 전에 넘치려는 분수 밖을 넘보는 일을 경계해야겠다. 

 

모든 일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우한 독감도 바이러스 접촉의 원인이 있고, 건강한 사람은 건강할 수 있는 원인의 삶을 살고,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로운 원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대나무가 큰 키를 자랑하는 것도 속을 비워 몸체를 가벼이 하고 마디를 만들어 충격에 대비하는 성장 비밀의 원인이 있는 것이다. 곧 성취되는 일이란 없는 법이지만 원인이 되는 삶은 가능성을 보게한다. 희망이 고문이 되어도 인내하고 기다리는 습관만은 잃지 않아야 하리라. 

 

시간에 대하여, 나의 기억력과 집중력을 짚어 보며 잡다한 생각들에 머뭇거리는 이시간이 오히려 맘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요즘의 코로나 상황이 준전시처럼 살벌하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질병을 정복한 인간에게 바이러스도 진화해가며 공격을 해 온 것이다. 더 높은 면역력을 마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