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20년

이 한 권의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수행화 2020. 3. 23. 11:27

1964년 '이 어령' 선생님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것이 이것이 韓國이다"

 

"惡運과 가난과 橫暴와 그 많은 不意의 災難들이 소리 없이 엄습해 왔을 때에 그들은 언제나 가축의 몸짓으로 쫓겨 가야만 했던 것일까? 그러한 손길로 몸을 피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가?
우리의 皮膚빛과 똑같은 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우리의 비밀, 우리의 마음이 있다”  < 風景 뒤에 있는 것. P.21. >

“우리는 미래보다는 현재를, 현재보다는 과거를 돌아다보며 세상을 살아온 것 같다. 모든 것이 過去中心으로 되어 있는 나라다.
나라 전체가 그렇다. 역사가 불과  百年도 되지 않은 美國人에게 밀가루와 납작보리를 얻어먹고 살면서도 여전히 半萬年 찬란란 歷史를 자랑할 것을 잊지 않는다.  < 玩具 없는 歷史, P.156 >

“조상의 무덤에 望頭石을 세울 줄 알아도 어린이에게 玩具를 만들어 줄 생각은 없었던 이 民族은 未來의 盲人이었다, 玩具 없는 歷史 그것은 未來 없는 歷史와 같다.”  < p.157>

猛獸들이 어떻게 자기의 상처를 治癒해 나가는지를 알고 있습니까? 그는 홀로 자기 傷處를 자기 혓바닥으로 핥는 것입니다. 아픈 상처를 스스로의 肉身으로 건드려야 하는 意志- 한국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우리의 마음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숨찬 혓바닥을 내놓고 피맺힌 상처를 핥고 있는 맹수의 그 분노와도 같은 것- 우리는 누구나 그러한 감정 없이 韓國의 歷史를 들여다볼 수가 없습니다.  < P. 324 >

      

 

전 지구인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단단히 철퇴를 맞고 있다. 급기야 우리네 일상에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독특한 예방법이 도입되어 나도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갑갑한 마음을 뒤로하고 소일거리를 찾아본답시고 집안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정물처럼 서 있는 책장에 눈이 갔다. 신간도서며 베스트셀러며 짬짬이 도서관 책 대출해 보기에 바빠 내 집 책은 늘 후순위로 밀려나 있던 터였다. 그런 도서관도 지금은 휴관이라 내 집 책이나 뒤져볼까 하고 무심하게 책장 문을 열어보니 묵묵히 시간을 지킨 책들이 거기 오롯했다. 나이 들면서 다시 읽으며 벗할 생각에 남겨 둔 책들이었는데 언제 보겠다는 셈으로 묵혀 두고 있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많이 버린 책 사이에서 그래도 살아남은 것들이니 분명 내가 아꼈던 책 들인데 이제 보니 나와 함께 늙어, 빛 바래고 풀기가 죽어 있어 씁쓸한 마음으로 바라보다 몹시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이 한 권의 책,
내 인생의 책,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 이것이 이것이 韓國이다-"

 

글씨는 쌀알 반톨만하고, 세로 읽기 2단으로 편집된 데다 한자가 많이 혼용돼 있어 한나절이나 낯을 익혀야 했다. 소싯적 내가 열심히 읽던 소설들을 비롯한 많은 책들이 대부분 세로 2단 편집이었고, 당시에는 큰 불편 없이 읽었었는데 지금에 와서 새삼 낯설어진 이 느낌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사이 책 세상이 좋아져서 좋은 지질에 큰 활자로 편히 읽었다는 걸 잊고 살았었나 싶다. 한 줄 한 페이지를 알곡 헤아리듯 촘촘히 활자를 쫒으며 읽었던 여고생, 나의 모습이 회상되면서 애잔한 마음이 잠시 스친다. 그 시절에는 '안광이 지배를 철하고.....'라는 말을 흔히 써가면서 깨알 쏟아 놓은 것같은 책을 쓸어 읽는 것이 일상이요, 여가선용이었지 싶다.

소설을 즐겨 읽어대던 나의 독서 취향은 이 책을 읽은 이후 지형에 큰 변화가 생겨 이 어령 선생님의 책은 물론, 김 형석 교수님, 안 병욱 교수님의 글도 열심히 읽었고 사 모았었다. 이 즈음 내가 받은 지적 충격은 훗날 지적 허영심이 되어 작은 위안도 주었지만,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끊임없이 생산해가며 나를 불안하고 힘들게도 했었다. 이 모든 것이 정신적 사치였다는 것을 아는 데까지는 시간이 많이 흘렀다. 진정 힘든 세월이 그걸 가르쳐 줬다. 

이 책을 추천해 주신 분은 여고 시절 국어 선생님이셨고, 작은 오빠가 사 주셨으니 추억 여럿을 품고 있는 책이다. 교과서 이외 교재로 신선한 수업을 하시던 선생님께서 어느 날 신간 서적 한 권을 들고 오셔서 앞부분 몇 페이지를 읽어 주시면서 필독을 권하셨다. 그리고 지금 옆자리 친구를 경쟁자로 여기지 말라, 시선을 저 멀리 두고 미래를 보라는 요지로 열정 가득한 수업을 하신 것도 좀처럼 잊지 못한다.

그런데 그 주말 작은 오빠가 볼일이 있어 부산에 오셨고 함께 시내로 나갔다. 오빠는 내게 오늘 너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뭐든 다 해주겠다고 호기 있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저 없이 책 사겠다고 했고 오빠와 보수동 서점에 가서 이 책을 샀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마치 최신 패션을 장착하고 잔뜩 멋이라도 부린듯 우쭐해졌던 기억이 있다. 책을 좋아하는 작은 오빠와 당시로는 대형서점이던 그 서점에서 보낸 시간도 당연히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이 책의 초판이 1963년 12.15일로 찍혀 있다.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했었으니 전후 불과 10여 년 후의 책이라는 것은 일단 놀라움이었다. 엄청난 고통과 혼돈을 관통해 나가던 고난의 시절이었을텐데 개념 없이 글줄만 읽었다는 걸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야 깨닫다니! 전쟁의 상흔은 내 알바 아니었고, 몸으로 그 시대를 살아 낸 어른들의 고통을 헤아리지도 못했다는 자각에 홀로 슬퍼졌다. 이 마음 바탕이 글의 이해를 더욱 도왔지 싶다.

 

'울음에 대하여', '굶주림의 그늘', '長竹 有感', '汽車와 反抗', '시집살이의 分析'.......
제목이 주는 우울함이 선연한데 어린 시절에는 그저 사색의 제목쯤으로 여겨 책에 코를 박고 읽었으니 한참 철 없었고, 그래서 행복했었나 보다. 그때도 맞았고, 지금도 맞다. 철 드는 일과 행복은 반비례 관계이니까.

두루뭉술하고 실체 없는 자존감이 다 무슨 소용인가?
이 글들은 한국인의 초상에서 가난과 슬픔을 크게 조명했고, 흙에다 바람에다 흩뿌리던 눈물과 울음을 담대하게 끄집어낸 자조와 자학의 글이었음이 분명하다. 흙빛과 닮은 우리의 현실, 한국인의 모습을 직시하라며 충격을 가하는 글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알아봤다. 우리의 부모 형제가 살아 낸 고난의 기억들은 이 책 페이지와 더부러 퇴색해 갔었다는 것도 알아봤다.



방학이면 흙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는 길을 역시 흙먼지 뒤집어 쓴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매캐한 흙 냄새, 기름 냄새에 몇시간을 시달리며 달리다 어느 모롱이를 돌아설라치면 선명한 황톳빛 언덕이 눈에 들어왔고, 나에게 그것은 읍내를 알리는 어김없는 이정표였었다. 지금은 울울한 산자락이 되었으나 그 시절 그 황톳빛 언덕의 기억은 내 사치한 한 슬픔이었다. 하여, 훗날 '서편제'  영화에서 황톳빛을 보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바람이 이는 황톳길에 구성져 흐르던 '아리 아리랑 쓰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이야기의 전개와 눈물과는 전혀 맞지 않는 코드이건만 나는 그지없이 눈물을 쏟았었다. 나는 흙을, 바람을, 황톳길을 슬픔의 메시지로 이해했었다. 다시 읽은 책에서 내 슬픔의 내력이 재구성되어 새로웠다.

황톳길에 대한 슬프고 두려웠던 기억은 또 있다.
'가도 가도 황톳길......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오빠 방에서 우연히 읽은 한 하운 시인의 시 한 줄이 충격이었고, 어린 나는 무섬증을 오래 앓았었던 일이다. 한 하운 시인은 나병 환자였고 황톳빛 남도 풍경을 눈물겹게 읊었고, 이렇게
황톳빛이 지금 껏 나에게 슬픈 컬러로 남게 된 것이됐다.  

 

잘 포장된 길을 자가용들이 메우고, 맛집 순례가 어엿이 취미의 한 축이 되었고, 다이어트가 일상의 뜨거운 이슈가 된 현실이 우리에게는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지금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뒤엎을 듯 기세 등등한 것은 어쩌면 과거를 잊은 우리, 그대들에게 얼마간의 시련을 던져 가난과 슬픔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줘 보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엄중한 시절, 꽃도 조심스러워 피우기 힘들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데, 어제 뜰에 활짝 핀 목련꽃을 보니, 화려함이 비현실적이라 조화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나도 어지간히 주눅이 들긴 들었나 싶었다. 겨울의 마법이 풀리면서 푸른 물을 올리는 저 잎새들을 보며, "마법이란 조건이 주어지면 풀리는 것이로구나!", 그래서 써 저장하지도 않은 오랜 기억들도 조건이 일어남에 마법 풀린듯 홀연히 떠오르누나 하며 마을을 한바퀴 걸었다.

 

슬픔은 슬픔대로 즐거움은 즐거움대로 우리의 기억 창고에 저장이 된다. 펄펄 뛰던 모든 날것의 기억은 시간 속에 켜켜이 얼버무려져 결이 삭고 삭으며 숙성되어 유순하고 몹시 간결해지는 것같다. 추억이 오래 머물렀던 이 책을 다시 본 느낌은 그렇다. 이 어령 선생님은 이렇게 우리 시대의 영원한 스승이 되었고, 지성의 대명사로 우리의 성장을 한 축에서 버텨 주셨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민족 정서에서 신바람을 끌어내자고 하셨고, '디지로그'라는 신조어를 세상에 내놓으시면서 발 빠르게 디지털 신문물에 적응하신 열정은 오늘의 많은 젊은이에게도 귀감이 되시리라 믿는다. 컴퓨터 여덟 대와 디지털 기기가 제자리 제 몫을 하며 돌아가는 선생님의 서재 사진이 실린 퍽 인상적인 책이 내게 있다. 도전하고 실험하는 정신에 숙연해지던 기억도 있다. 단식을 하고 혈서를 쓰면서 보여주는 애국보다 구태를 벗고, 각자 제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소회가 글 중에 있었다. 요즘 같은 시절 길에다 내다 붙이고 싶은 심정이다. 1934년 생인 선생님이 생애를 바쳐 퍼 올리신 언어가 얼마며, 가르침이 어떠했던가, 많은 생각을 해보는 시간이었다.

책 첫 페이지에 실린 젊은 시절의 선생님 얼굴을 바라보며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 빌어 본다.

 

앞 페이지에 있는 선생님 젊은 날의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