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20년

스스로 봄길이 되어

수행화 2020. 4. 4. 23:49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 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정 호승. 봄길 >

 

 

코로나 바이러스의 질긴 명줄은 언제나 끊어지려나, 이 폭풍이 휩쓸고 간 다음 우리의 삶은 어떠할 것인가? 분석과 전망의 말은 향연을 이루지만 그저 불투명하기만 하다. 불안에 절어 지내던 지난 2개월 여 동안의 신문은 확진자, 사망자 숫자 카운트하는 기사로 도배되어 접하기도 두려운 지경이었다. 그렇게 심란하던 어느 아침, 땀에 흠씬 젖은 한 의료인의 사진에 정 호승 시인의 시 '봄길'을 실은 한 편의 신문 광고는 내 마음의 배경을 싹 바꿔주기에 충분하게 참신했다. 누구를 탓하고, 무엇에 따따부따 불평을 던지며 이 봄을 불만으로 지새우지 않았나 하는 어떤 반성이 내 안에서 일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 없이 걷고 있는 누군가의 봄이 내 마음에 화하게 와 닿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렇다.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별을 보기 좋은, 깊은 어둠 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리라 싶었다. 

전신을 비닐로 감싼 듯 보이는 방호복을 입으면 숨이 턱 막히고 땀이 차며 그렇게 덥다고 한다. 그 방호복을 갑옷 삼아 바이러스 폭격의 최전선에 뛰어든 많은 의료진들에 숙연해지는 마음을 금할 수는 없다. 고글 자국이 선명한 이마에 밴드를 붙이고도 해맑게 웃어 주는 모습을 보아도 그렇게 대견해 보일 수가 없었다.
 한정된 인력으로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확진자를 주체할 수 없어 도움을 요청한 의사, 사명감으로 달려가 치료에 매달리던 의료진들, 불철주야 방역지침에 전력을 다하던 질병관계 담당자들, 드라이브 스루 방식으로 안전하고 빠른 검사 방식을 고안해 낸 의사분, 얼른 생각해도 치하하고 싶은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물론 마스크며 손 씻기에다 사회적 거리 유지에 적극 동참한 우리들 모두가 이인삼각의 한 축을 이루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Stay home. Save lives. Help stop coronavirus."
구글 검색창에도 이런 슬로건이 나 붙은 걸 보면서 지금 전 지구인의 염원이 바이러스 방역이라는 하나의 초점에 맞춰져 있다는 걸 실감한다. 지구는 은하계 속의 한 행성으로 세계는 지구촌의 공동 운명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것같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중국 서해안의 공장들이 제대로 가동을 못한다더니 그래서인지 우리에게는 근년에 보기 드물게 하늘이 제 색깔을 내며 투명한 날이 많다. 일상이 다이내믹하지 않은 나에게도 자잘한 변화는 있다. 우선 계절을 조금 찬찬히 지켜본다는 느낌이 있다. 인적이 뜸한 시간에 일 삼아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하기로 했더니 무심히 보아 온 것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가련해 보이기까지 하던 버드나무 마른 가지가 푸르스레한 안개를 머금은듯 휘뿜한 것이 착시인가 했더니, 이내 연둣빛 잎새들이 점점이 뿌려지는 걸 보았고, 어제까지 야무지게 입을 꼭 다물고 있던 벚꽃 봉오리는 밤새 희고 예쁜 꽃 싹을 틔워 아기 젖니 싹 바라본듯 사랑스러웠다. 가만가만 오는 봄을 알아채고 지켜본 것 같아 여간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꽃들이 소담스레 송이를 이루고, 꽃 그림자가 번져가던 즈음에는 꽃길을 하릴없이 오르락내리락 걸으며 하늘을 배경색으로 사진을 찍어보기도 하다 보니, 사회적 거리두기는 뜻밖에도 개인적이고도 소소한 즐거움이 있다는 생각을 해 봤다. 

식물들의 생몰을 생체 리듬이라고 말들 하지만 너무 메마른 것 같고, 그 안에는 분명 정령이 있어 나고 죽음을 의지로 관장하고 있지 않나 싶다. 꽃의 생애를 느린 비디오로 감상한 것 같은 신선함으로 광휘의 봄날을 잘 바라보았다. 오가는 길에 찍어 둔 갖은 꽃 사진이 나의 유례없는 화려한 봄맞이를 말해 줄 것이다. 나무 이름 꽃 이름을 잘 모르는 나는 이름 모르는 꽃은 꽃이름 찾기 앱을 봐가며 이름을 익혔으니 이제 이팝나무 꽃과 조팝나무 꽃을 분별하는 극히 초보적인 지식은 갖게 됐다. 시인처럼 꽃이름을 불러 주려했더니 입에 올려지지 않는 험한 이름을 가진 꽃도 있어 마음이 상해 버리기도 했다.

 
한때 LOHAS (Lifestyle Of Health And Sustainability)라는 단어가 유행어처럼 회자하다 시들해지나 했더니, 또 북유럽 감성의 휘게 (Hygge)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해야 한다고도 하고, 소확행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렸다. 일상의 번잡함을 덜어내고 소박하고 여유로운 자기만의 시간에 가치를 두고 소소한 즐거움에서 행복을 찾자라는 의미를 머리로는 익혔다지만 실행이 녹녹치 않았을 터이다. 어쩌면 전 지구인의 시간을 거꾸로 빠르게 돌려버려 행동반경을 여지없이 좁혀 버린 지난 두어 달, 우리는 휘게 라이프 스타일의 일부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체험해 본 것이라 해도 될 것 같다.  

학교가 임시 휴교하고, 재택근무가 권장되면서 가족끼리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니 생활패턴에 적지 아니 변화를 몰고 왔다. 외식은 줄어들었고, 배달 음식, 반조리 음식 소비는 늘어났다는 것, 온라인 손가락 쇼핑이 늘었다는 것, 아이들 데리고 요리 하기, 콩나물 길러보기, 화분 키워보기, 뜨개질 하기, 오목 두기 등 가족과 시간 보낼 갖가지 아이디어의 일상살이가 소개되기도 하지만 일단 주부들의 '돌밥 돌밥' 스트레스는 어쩌지 못하는 문제라고들 한다. 

코로나 확진자를 2번, 31번, 52번이라며 번호를 매겨 갈 때, 왜 김, 이, 박이라든지, A, B, C라 칭하지 않나 의아했더니 이미 10,000명 이상의 확진자를 예상이라도 한 것이었을까 싶기도 하다. 음압실이며 펜데믹이며, 드라이브 스루며, N95 마스크며, 비말 감염, 코로나 블루며 하는 생소한 말들이 이제 일상 속에 자리 잡아 익히 쓰이고 있고, 세계 각지의 확진자, 사망자 숫자들 헤아리는 뉴스도 일기예보 듣듯이 무심히 듣게도 되었다. 

어떤 의사가 가장 안전하고 신속한 검사를 위해 권장한 드라이브 스루 검사 시스템이 이제 미국을 위시한 전 세계에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아가 드라이브 스루가  워킹 스루 시스템으로 발전하나 싶더니, 드라이브 스루 농산물 판매, 수산물 판매, 급기야 고급 호텔에서도 드라이브 스루 도시락 판매를 시작했다고 하니 이제 얼굴을 맞대지 않고 해결할 일이 쏟아질 것 같다는 예상은 나도 할 수 있다. 

꽃놀이 상춘객을 차단하겠다는 의지로 속초에서 아름다운 유채꽃밭을 갈아엎는 광경에 마음이 쓰라리더니, 세계적 축제인 올림픽도 연기하는 마당에 이런 정도 충격은 별게 아니지 않나 마음 고쳐 가져본다. '방콕'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자연콕'을 시도해 보겠다고 한강공원에 텐트를 거리 두어 설치하고 콕하겠다고 하는 진풍경에 웃음 아닌 웃음이 나오고, 이름 난 꽃길을 차단하니 급기야 '드라이브 스루 꽃구경'으로 틈새를 노리는 영리한 사람들도 속출했다. 위기는 기회인 듯 기발한 아이디어와 유머들을 팝콘 튀기듯 튀겨 내어 전해 듣는 즐거움도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신체 노화 걱정에 못지않게 디지털 노화 걱정을 해야 할 세상이 온 것 같다. 노인들이 온라인 쇼핑에 서투른 건 약과로, 아이 둔 엄마는 디지털 환경에 능해야 아이들 온라인 수업에 척척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고, 교사도 능동적으로 처리해 나가야 할 일들이 산적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곧 이 어려움도 극복해 버릴 것이다. 마스크 사용 100%도, 자발적인 사회적 거리 두기도 재빠르게 생활화 해 보이는 신속성을 알기 때문이다. 얼마 전 병원 가겠다고 지하철을 탔더니 벌써 냉방을 가동하여 알레르기 체질인 나는 갑자기 재채기를 해댔고, 긴 차내의 온 시선이 나에게 쏠려 민망하기 그지없었던 일이 있었다. 물론 마스크를 했고, 팔로 얼굴을 있는 대로 감쌌지만 의심의 눈초리를 받아야만 했었다. 그날 이후는 자동차를 타고 다녔는데 차에서 내려 횡단보도에 서 있는 나에게 또 집중되는 시선이 느껴져 당황했고, 내가 미처 마스크 착용을 안 하고 서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내가 나를 지키는 것이 남을 위한 배려가 되어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게 된 이 엄중한 시기는 오래 잊히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야기한 온갖 변화들에 마음이 빼앗겨 울적하다가도 한나절 책을 잡고 앉으면 의외로 마음은 정돈이 되는 걸 알게 됐다. 흙탕물을 가만히 두면 저절로 맑아지는 이치가 이와 같을 것이다. 꿩 대신 닭으로 극장 출입 대신 넷플릭스 영화를 봐가며 바이러스에게 시간을 좀 더 줘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