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21년

'나의 눈부신 친구'- 엘레나 페란테

수행화 2021. 3. 14. 10:32

 

작가 엘레나 페란테(Elena Ferrante)는 작품이 널리 돌풍을 일으킨 것에 비해 상당히 베일에 가리운 인물이라고 한다.  그녀의 작품이 영미권은 물론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 34국에서 출판될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출신이며, 고전문학을 전공한 여성이라는 점 이외에 별 알려진 정보가 없는 모양이다.

 나는 때때로 아무런 정보 없이 그저 제목에 끌려 책을 읽을 때가 있다. 이번에도 오래 전에 어디선가 보고 메모해 둔 책 제목이 설핏 떠올라서 도서관 대출 신청을 했더니 바로 받게 되어 졸지에 읽었다. 그러자니 무심히 페이지를 넘겼는데, 뜻밖에도 예사롭지 않은 문장에 곧바로 매료되었고, 1권을 빛의 속도로 읽어버렸다. 책을 덮고나서 끝이지만 끝이 아닌 미진한 마음에  찾아보니 이 소설이 4부작의 장편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나의 무지를 탓했다. 

장대한 이야기는 총 네권으로 엮어졌고, 1권 '나의 눈부신 친구'는 유년의 이야기, 2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는 청년기의 이야기, 3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는 중년기의 이야기, 4권은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는 장년기의 이야기이다. 
소녀가 성장하여 어른이 또 60의 할머니가 되어가는 과정은 누구나 한 편의 소설일 수 있다. 

60년 지기의 친구 릴라가 어느 날 실종하는 데서 이야기는 시작이 된다. 1인칭의 화자 레누와 친구 릴라의 우정이 한 시대의 변천만큼 변화무쌍하게 펼쳐지고, 고향 나폴리의 빈곤과 어둠이 짙은 배경으로 깔려져 서로 교직을 이루며 시간의 역사를 직조하는 것 같았다. 화산 폭발의 천재지변은 덤으로 가하는 고통으로, 그나마 확실해 보이던 일상의 안정감마저 앗아가고말아 희망과 구원은 요원해 보이는 세월도 살아낸다. 60년 세월의 바탕에 이탈리아 남부인들의 기질과 인생관이 엿보였고, 정치적 혼돈과 부정부패가 이 시대를 관통했음을 알아보았다. 혼돈의 시대에 부를 축적하기 위해 저질러지는 갖은 수단들도 악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무엇보다 이탈리아라는 사회가 이토록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였었나 하는 충격이 가장 컸다고 하겠다. 물론 나만의 개인적이고도 짧은 이해인지는 모르겠다. 

레누와 그들 유년기의 기억은 슬프다. 사람들은 빛을 믿지 않고 빛 사이의 어두운 구석을 바라보고 있어, 들판도 거리에도 어디에도 밝은 곳은 없었다고 회상한다. 모두들 폭발 직전의 감정이 본능인양 폭력을 일삼고, 무례와 폭언이 일상에 넘쳐나니 칼춤은 곳곳에서 일어난다. 어린 레누가 이 어둠의 힘을 밀어내고 집안의 오랜 무지의 끈을 끊어내고 학업에 정진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안도하다가도 딸의 전도를 방해하는 강력한 어둠의 힘이 도사리고 있어 불안은 걷히지 않는다.
어른들의 무지와 폭력에 심신은 상처 입고, 딸이라는 이유로 희생도 감내해 가며 소녀는 성장해서 사회의 일원으로, 주부로 할머니로 지위를 바꾸며 나이 들어간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부제가 맞아들 것같은 폭발성도 안고 있어 보인다. .아이는 보호 받지 못하고 폭력에 노출되고, 장안에 위선이 뻔뻔하게 넘쳐나고, 거친 말들이 잔치를 이루는 후진성 가득한 그때 그 시절이 불편하고 슬퍼지면서 독자는 1인칭의 레누에게 연민심을 일으키게 된다. 

레누는 시청 수위의 딸로 노력하는 모범생이고, 친구 릴라는 월등한 지능을 타고났으나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둘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친구 릴라는 몹시 가녀린 외모에 신경질적이면서 공격적인 성격을 가졌다. 어떤 금지된 일도 가뿐히 어길 수 있는, 한계를 넘을 줄 아는 당돌한 소녀라고 말한다. 릴라는 동화책을 써서 장차 큰 부자가 되겠다는 꿈을 말하면서 실제 소설 하나를 써서 레누에게 보여주는가 하면 중학교 과정의 라틴어와 그리스어 문법을 독학으로 터득해 내어 성실하게 노력하는 레누의 열등감을 마음껏 자극한다.   

릴라는 어린 나이에 마을의 재력있는 청년과 결혼하여 부러울 것 없는 안락한 생활을 꾀하며 현실화한 부자의 삶에 만족하나 싶다가 곧 특유의 멋대로 생활과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인생이 불행해진다. 그녀는 인생이 복된 시절에도, 불행에 처한 시기에도 친구 레누에게 도발하고 상처를 입히며 열등감에 빠뜨릴 기회는 결코 놓치지 않는다. 노력파 레누는 어렵사리 대학을 마치고 작가가 되었어도 자기 우월감을 감추지 않는 릴라의 예측할 수 없는 태도에 크게 상처를 받으면서도 60년 세월의 우정은 끈어질듯 끊어질듯 이어진다. 불화를 일으키고 삶에 증오심을 심어 놓는 사악한 지성, 주변 사람을 노예로 삼고 파멸로 이끄는 그런 류의 매력을 가진 친구라는 걸 알면서도 운명처럼 올가미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전직 목수네 가족, 시청 수위네 가족, 구두 수선공네 가족, 야채 장수의 가족, 철도원의 가족, 주점 제과점 소유의 가족, 제빵사 가족..... 빈곤이 보편적 일상인 마을에서 각자 자기 몫의 시간을 살아가며 얽히고 설켜가는 과정들을 가계도를 참고 삼아 읽으면서 이게 삼국지라도 된다는 말인가 하고 혼자 웃음 짓기도 했다. 부의 흐름에 인심이 앞다퉈 흐르면서 배신과 증오가 득세하는 한 시대를 이탈리아 남부인들이 살아낸 것 같은 그림이 그려진다. 그 삶이 위험해 보일 정도로 적나라하다.

"남성의 영억이 우주까지 확장되는 데 비해 지구 상에서 여성의 삶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여성은 지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여성은 예측할 수 없는 주체이다"   < 3권, P. 394 >

"나는 성숙이란 결국 삶의 굴곡을 호들갑 떨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상적인 삶과 이론 사이에 균형을 잡으며 길을 가는 것이라고, 변화를 기다리며...."   < 3권. P. 506 >

폭압적이고 충분히 우울할 수 있는 스토리지만 문장이 아름답고 정교하여 기록적으로 독파 시간이  짧은 것으로 나의 독서 이력에 남지 않나 싶다.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60년 우정의 세월은 우리가 아는 이탈리아 영화같은 여러 요소가 고루 보인다 했더니, 역시나 미국 케이블 방송사 <HBO>가 드라마로 제작하여 인기리에 방영 중이라고 한다. 이런 작품을 미리, 멀리 알아보는 능력 있는 자들이 우리를 편히 극장으로 인도한다니 기대 만발이다. 어쨌거나 누가 읽어도 영화일 수밖에 없는 총 4부작의 이 대하소설로 2021년을 열었다. 

"2015년 이탈리아 스트레가상 노미네이트, 2015 BBC 선정 '올해 최고의 소설', 2015년 가디언지 '작가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책', 2016년 타임지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100인', 2016년 맨 부커 인터내셔널 상 노미네이트"

다채로운 수상 소식이 있는 이 장대한 소설은 바깥출입이 뜸할 때, 집중이 잘 안될 때 붙잡고 앉으면 여러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는 소설이라 생각이 든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걸으면서 하는 독서라'라고 하는 말을 제대로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