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22년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수행화 2022. 9. 2. 00:38

 

 


무성한 추억을 남기고 이 여름도 떠날 채비에 들었다. 가을이 성큼 창문 턱까지 다가오며 가는 걸음을 재촉한다. 가열했던 여름도 보내는 마음은 아쉬운 일. 미국 사는 딸네 가족이 방학을 우리 집에서 보내면서 아주 다채로운 여름을 보냈다. 아이들은 추억을 만들어 여기도 두고, 또 그득히 안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나의 공간은 본모습을 되찾았지만 일상은 늘어진 고무줄 형국이 돼 버렸다. 맥 놓은 시간이 점점 길어져 타성에 젖어들 것만 같은 불안감이 스멀거려 맘 크게 추슬러 닥치고 독서에 돌입하기로 한다. 일단 책상 위에 이 책 저 책 수북이 쌓아 두고 오며 가며 바라보는 것이 먼저다. 그게 은연중 무게감이 되어 압박을 가해 오니 책을  뒤적뒤적 하게 되던 경험이 있다. 이번에는 마침 아는 동생이 강추한 책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가 머릿속에 있어 시작이 조금 쉬웠다. 시절 트렌드에 발 맞춘 신식 책들을 골라 소개를 잘해 주는 이 동생이 거듭 강추했고, 신문 지상에서 또 누군가 추천하여 정공에 협공을 받았던 터라고나 할까? 

'마쓰이에 마사시'라는 일본 작가는 1958년생으로, 나에게 생소하나 이미 2013년 '요리우리 문학상'을 받을 정도로 인정 받는 작가라고 한다. 세밀화 그리듯 공이 든 글을 읽다 보면 작가의 공부가 얼마나 깊고 다방면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장착한 분인지 알 수가 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82년이고, 건축학과를 갓 졸업한 '사카니시 도오루'가 일인칭 화자로 서술한다. 이 건축학도는 존경하는 건축가 '무라이 슌스케'의 설계 사무소에 특별 채용이 된다. 국립 현대 도서관 설계 응모를 위한 실무팀 충원에서 기회를 얻은 것이다. 무라이 설계 사무소는 여름이면 가루이지와의 여름 별장으로 사무실 기능을 모두 이동하기 때문에 새로꾸려진 설계팀의 업무도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업무 이외에 요리도 하고, 감자 수확도 하고, 불을 피우는 등의 일들을 두루 해 나가며 함께 여름을 난다. 이렇게 덤으로 하는 일들로 에피소드가 확장되고 잔잔한 추억들이 쌓여간다. 

"연필 깎는 소리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기타아오야마나 여름 별장이나 같았다. 시작해보니 분명히 그것은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작업으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커피를 끓이는 향내처럼, 연필을 깎는 냄새에 아직 어딘가 멍한 머리 심지가 천천히 눈을 뜬다.사각사각하는 소리에 귀의 신경도 전원이 켜진다."     P. 63. 

소설은 국립현대 도서관을 설계하는 1년여의 과정을 서술하는 것이 큰 줄거리이다. 칠십 중반의 건축가, '무라이 슌스케' 와의 작업 과정을 통하여 가치 있는 건축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소들을 듣게 된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독자적인 아름다움이 있으며, 사용자의 편의성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 'Iess is more' 를 구현하라는 점 등 선생님의 건축철학을 정돈한다. 그리고 현존하는 유의미한 건축물의 독특한 설계를 비중 있게 소개한다.

작중의 나는 무라이 슌스케의 설계인 '아스카야마 교회'를 답사하여, 실측까지 해 가면서 선생님 건축물의 특징적인 디테일을 찾아보는 노력을 한다. 그리고  '숲의 묘지'에 대한 설계와 관람 감상을 소상히 쓰면서 건축가, '군나르 아스플룬드'를 알리기도 한다. 20세기 이후 건축된 시설물 중에서 최초로 1994년에 유네스코 세계자연 유산에 등록됐다는 이 묘지는 지금도 스톡홀름 서민들의 장례와 매장에 사용되고 있디고 하니 훌륭한 기능과 아름다움을 담은 건축물의 생명력을 보여 주는 것같다.

아스플룬드의 마지막 일이 된 '숲의 묘지'를 방문하면 사람들은 물결치는 것같은 완만한 언덕을 오른쪽으로 보면서 길고 낮은 담을 따라 납작한 돌이 깔린 진입로를 곧장 걸어가게 된다. 각자의 걷는 속도에 맞추어 죽음의 세계가 다가온다. 진입로 왼쪽에 있는 낮고 하얀 담은 여행을 지탱하는 지팡이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P. 186

원형의 미로라는 '스톡홀름 시립도서관'의 설계를 분석해 가며 건축가의 심미안을 피력한 장에서는 멋진 도서관 풍경이 머릿 속에 요모조모 그려져 재미를 준다. 모름지기 도서관이란 책을 찾는 곳일 뿐 아니라 별 생각 없이 서가와 서가 사이를 걷기만 해도 즐거워지는 장소여야 한다는 것, 그러다 기적처럼 좋은 책을 만나면 좋지 않겠느냐는 구상도 참신하여 마음에 담아진다. 원형이거나 곡선을 이룬  서가 사이를 산책하듯 걸을 수 있고, 높낮이를 달리 한 서가 앞에서 책을 골라 볼 수 있다면 그 행복이 어떠하랴 싶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만드니까 보기에는 그럴싸하지만 전혀 쓸모가 없다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되지. 또 하나 건축가란 말이야, 역시 후대까지 기억되는 건축물을 만들지 않으면 주어진 역할을 다한 것이 못돼."    P. 140. "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건축에 혼을 불어 넣은 어떤 건축가의 삶을 조명해 보는 건축에 관한 이야기 한편과, 해발 1000m 고지에 자리한 여름 별장의 자연 생태계 이야기 한편을 동시에 읽은 느낌이 잠시 든다. 충과 조류, 식물 등에 관한 예사롭지 않은 상식이 섬세한 문장을 만나 여름 별장에 서정을 더해 주어서인가 한다. 

별장 이웃의 멋진 주민들과의 교류와 청량감 있는 대화도 소설의 한 축이다. 화제가 미술이요 음악이며 꽃 가꾸기로 이 별장 생활의 일상에 지적인 배경을 둘러 줘 소설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요즘 신작 소설들에서 지나치게 과격한 표현이나 욕설을 포함한 거친 대화들을 쏟아내어 곤혹스러웠던 적이 많아서인지 이렇게 잔잔히 오가는 대화는 평화로워 격조까지 느껴진다.

흔적도 없어진 아오쿠리 마을에 태양광선과 비기 내리쬐고 바람이 씨를 옮겨온다. 몇 안되는 씨가 싹을 틔우고,쭈뼛쭈뼛 뿌리를 내린다. 화산재도 토석류도 이 작은 초록에는 어마어마한 양분이다. 듬성듬성한 초원 틈에서 어린나무가 가지를 뻗고 이윽고 숲이 형성된다. 나무들과 풀에 이끌려 벌레와 새가 온다. 낙엽은 부엽토가 되고 숲은 가속도가 붙어 기세 좋게 큰 숲을 이룬다.
P.45.

8월 끝 무렵이 되자, 아오쿠리 마을의 여름은 서둘러 돌아갈 채비를 시작한 것같았다. 낮에는 한여름 기온에 가까워도 , 저녁 나절에는 바람이 슾을 지나가면서 햇살의 흔적을 빠짐 없이 지워간다.   P.286. .
세익스피어는 읽어두는 게 좋아요. 건축가든 과학자든 피아니스트든 말이에요."
한여름 밤의 꿈은 자는 동안에 허츠이즈, 즉 비올라 트리컬러 꽃 즙을 눈두덩에 떨어뜨리면 잠에서 깼을 때 처음  본 사람을 무조건 좋아하게 되는 마약으로 사용해서 한 눈에 반한 사랑이 일으키는 희극을 그린 것이다. 그 장난을 획책한 이가 숲의 요정들이다,    P. 318

자연의 형태나 색채가 합리적인 이유만으로 태어났다면 예컨대 꽃에게, 새에게, 나무에게 이다지도 많은 종류의 변화가 초래되었겠는가, 박새의 가슴께에 흑백으로,그려진 무늬는 왜 그렇게 생겼는지, 각각의 개체로는 알수 없을 것이다.  P. 322. 

드라마틱한 재료가 없는 이 소설은 작중의 일인칭, 사카니시 도오루'가 29년 만에 여름 별장을 찾으면서 많은 기억들이 소환된다. 채택되지 못한 선생님의 도서관 설계 모형은 아크릴 상자의 정물이 되어 있었다. "건축은 예술이 아니고 생활 그 자체다"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귓전에 울려 상념에 빠져든다. 비록 선생님의 설계가 생명을 갖지는 못했지만 그의 영혼마저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방점을 찍은 것같다.세상의 많은 건축 설계물들, 선택되지 못한 채 무정의 물건이 되어버린 무수한 설계물들을 생각 해 보매, 이 글은 이렇게 버려진 숱한 건축 설계들에게 보내는 진혼의 글이라는 표현이 적확하다 해야겠다. 연민심이 우러난다.

건축은 준공되고 나서 비로소 생명이 부여된다. 나는 어느새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건축은 이용객과 그 시대에 의해 숨결이 부여되고 살아난다. 그렇게 악취미로 생각되던 니시하라 캐시드럴 성 베드로 대성당도 지금은 주변 풍경의 중심이 되고, 조용한 침착함을 느끼게 하고 있다. 사람과 시간이 그 대성당을 키운 것이다.  P. 415

수채화처럼 담담하고 잔잔한 문장으로 일단 우리를 매혹시키는 소설이다. 어려운 말 쓰지 않아도 묘사가 섬세할 수 있고, 독자에게 생각할 자료를 줄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글이라 생각된다. 요리면 요리, 꽃이면 꽃, 반딧불이면 반딧불이, 새라면 새......일상과 자연이 어우러져 여름 별장을 특별하게 해주는 소임도 아름다운 문장이 해낸 것 같다. 여름은 무작정 내쳐버릴 계절이 아니고 그 안에 간직된 아름다움을 찾아 가치 있게 써야 할 것만 같다. 나의 눈이 보배이길 바라본다. 지금은 여름을 떠나 보낼 시간이다. 등화가친을 들먹일 계절인 것이다. 책과 나무가 찰떡 궁합이라고 하니 나무에서 생이 시작된 책을 더욱 사랑하고 싶다.

그런데 섬세하게 정제된 언어들을 길어올리는 탁월한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으면서 몹시 친근감이 들었다.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이 기억을 간질이며 맴돌아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일본 소설을 대충 찾아봤다. 아! 이유가 없지 않았다. 김 춘미 씨라고! 번역가가 같은 분이시다. 내가 아주 잘 읽어 좋아했던 소설 '본격소설'의 번역자였다. 반가운 마음이 앞서고, 아울러 과하지 않고 부족하지 않게 감칠맛을 내는 번역자의 언어 구사에 존경심을 보낸다.

그리고 틈만 나면 나에게 책 소개를 해 주는 부지런하고 곰살맞은 동생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야 할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