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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 버트런드 러셀

수행화 2022. 11. 7. 15:17

버트런드 럿셀(B. Russell, 1872~1970)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지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저서를 남긴 철학자요 1950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로 알고 있다. 이 글은 1972년 3월 6일 전국비종교협회 런던 남부지부 후원하에 배터시(Battersea)읍 공화당에서 강연한 내용이라고 서두에 쓰여있다. 러셀은 순수 철학적 주제들에 기여한 바 크지만 도덕이나 종교에 관한 사상으로는, 기도교적 입장에서는 크게 이단자로 평가할 만하다고 한다. 설득력 있는 어법으로 자신의 견해를 거침없이 피력한 것은 어느 시대에서나 감동을 줄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말하기에 앞서 기독교인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정의한다.

기독교인이란 무엇인가?
누구든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별개의 조항 두가지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는 교리 차원의 것이다, 즉 하나님과 영생을 꼭 믿어야 한다......... 두 번째로 좀 더 들어가 크리스천(기독교인)이란 명칭이 내포하듯 크라이스트(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회교인들도 신과 영생을 믿고 있지만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최소한 예수가 신이 아니라 하더라도 가장 선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정도는 믿을 수 있어야 한다.......따라서 내가 왜 기독교인이 아니기를 설명하기 위해선 두 가지 문제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첫째, 나는 왜 하나님과 영생을 믿지 않는가? 둘째 왜 예수가 대단히 높은 수준의 도덕적 선을 행한 사람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최선(善), 최현(賢)의 인간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이 나라에서는 우리의 종교는 의회의 법률이 결정하는 것이므로 결국 지옥은 기독교인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지옥을 우기지 않을 것이다.    <p. 20>

하나님의 존재와 제1원인론
세상 만물은 모두 원인이 있으며 원인의 사슬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최초의 원인에 도달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 제일 마지막 원인에 하나님이란 이름을 늘 붙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것이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에게도 원인이 있어야 할 것이다.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세상도 하나님 없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사물에 시초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우리의 상상력의 빈곤과 다름이 없다,  <P. 22>

자연법칙론
행성들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음을 관찰한 사람들은 행성들은 그렇게 특정한 형태로 움직이도록 명령했으며 그 땨문에 행성들이 그렇게 돌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자연은 획일적인 방식으로 움직인다고 하는 뉴턴식 체계 하의 자연법칙 따위는 믿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과거에 자연법칙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인간의 인습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P. 23. 24.> 
자연법칙은 사물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 가를 기술하는 것으로서 사물의 실제 움직임을 기술하는데 지나지 않으므로 사물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움직이도록 명령하는 자가 반드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P.  25 >

목적론
환경이 생물에 맞추어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생물이 환경이 맞추어 변해왔기 때문이며. 이것이 적응의 기본 원리이다. 거기에 목적의 증거 따위는 없다. 이 목적론을 살펴보노라면  온갖 결함들을 지닌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계를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수백만 년에 걸쳐 만들어 놓은 최선의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가 놀라울 따름이다.     <P. 26>

신성을 위한 도덕론
만약 여러분들이 신학자들처럼 하나님은 선하다 말하려면, 옳고 그름은 하나님의 명령과는 무관하게 어떤 의미를 지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옳고 그름을 만들었다는 자명한 사실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명령은 선이며 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 무로 여러분이 그렇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선, 옳고 그름은 하나님의 명령과 무관하게 어떤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옳고 그름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에 있어 논리적으로 하나님에 앞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P.  29>

불의 치유론
하나님의 존재는 이 세상에 정의를 가져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이 한편에는 너무도 큰 불의 존재한다, 선한 자들이 고통 받고 악한 자들이 융성하는 일도 많아서  우주 전체에 정의가 존재한다고 믿기 위해서는 이 지구상의 삶의 불균형을 바로 잡아주는 내세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천국과 지옥이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강력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안전에 대한 갈망, 즉 나를 돌봐줄 큰 형님이 계시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갈망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싶어 지게 만드는 데 지대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요인이다.    <P.  29> 

애수 그리스도의 성격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최선 최현의 사람이었나 하는 문제 말이다.......예수가 한 말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이다. '악을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내주어라.' 이것은 새로운 가르침도 새로운 신조도 아니다. 예수보다 약 5, 6백 년 전에 이미 노자나 석가가 하신 말씀이다.   <P.31>

에수의 가르침에 담긴 결함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최선, 최현의 이사람이었나 하는 문제 말이다. 애수보더 5ㅡ6백 년 전 노자나 석가가 한신 말씀이고ㅡ '심판받지 않으려거든 심판하지 말라는 에수의 말.'네게 구하는 자에게 줄 것이며, 네게서 빌어가고자 하는 자를 외면하지 말라'
'네가 완벽하고자 한다면 가서,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  실천하지 못하고  < P. 33 >

예수의 가르침에 담긴 결함들 나의 관심사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이기 때문에 그다지 현명하지 못한 것같은 대목 몇 군데가 있다. 첫째 예수는 자신이 당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기 전에 찬란한 구름 속에서 재림할 것을 굳게 믿었다.
예수가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한 것이라든지 그와 유사한 말들을 했을 때는 가까운 기일 내에 재림이 일어날 것이니 현세의 모든 일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이 정원에 나무를 심는 것을 삼간 것과 같은 행위로 보아 다른 지혜로운 이보다 현명하지 못했으며 지고의 현자일 수는 없었다.   < P. 34 >

도덕상의 문제,
내가 볼 때 에수의 도덕적 성격에는 대단히 중대한 결함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즉, 그가 지옥을 믿었다는 것이다. 나는 누구든 진정으로 깊은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영원한 형벌 따위를 믿을 수는 없을 거라고 셍각한다.   < P.34.>
예수는 영원한 형벌을 믿었으며 자신의 설교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보복적인 분노를 터뜨리는 대목이 수차례 발견된다.   <P.34>
여러분은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보게 된다. '너의 뱀의 무리,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찌 지옥의 저주를 면하겠느냐? 예수가 지신의 설교를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한 말인데, 내가 볼 땐 결코 좋은 어조가 아니다. 복음서에는 지옥을 언급하는 이런 말이 대단히 많다. 성령을 거역한 죄악에 대해 말한 유명한 구절도 물론 있다. '누구든 성령을 욕되게 말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나 저세상에서나 용서받지 못하리라. 이 구절은 세상에 말할 수 없는 많은 불행을 야기했다....... "내 생각으로는 진실로 자비로운 성품을 지닌 사람이라면 결코 그와 같은 두려움과 공포를 이 세상에 심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또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그의 천사들을 보내 어 그의 왕국에서 거역하는 자와 부정하는 자를 모두 거두어 불가마에 던져버리리니. 거기서 통곡하고 이를 갈게 되리라"   <P. 35>

재림이 일어날 때 양과 염소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얘기하면서 예수는 염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 저주 받은 자여, 내게서 떠나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계속해서 '이들을 영원한 불 속으로 사라지게 하라'라고 한다.. 이어 다시 이렇게 말한다. '너의 한 손이 네 뜻을 거역하면 그 손을 끊을지니, 병신이 되어 생명으로 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으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들어가기보다 나으리라. 거기에는 언제나 구더기가 들끓고 불이 꺼지지 않느니라. 이 얘기 역시 예수는 되풀이한다. 나는 죄에 대한 형벌은 지옥불로 다스린다는 이 모든 교리가 잔인한 교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P. 36> 

이번에는 들을 때마다 늘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무화과 나무에 관한 희한한 얘기가 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얘기지만 그 내막은 다음과 같다.
'시장끼를 느낀 예수께서 멀리 서 있는 이파리 무성한 무화과를 보시고 먹을 것이 있을까 하고 그리로 가셨다, 무화과수에 가보니 아직 열매 맺을 때가 되지 않아 잎사귀 외엔 아무것도 없음을 아시게 되었다. 그때 예수께서 대답하시고 나무에 이르기를 '지금부터 영원히 아무도 네 열매를 먹지 못하리라'하시니.... 베드로가 예수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주께서 저주하신 저 무화과수를 보소서, 시들어버렸나이다'라고 하였다........ 나로서는 예수가 지혜로 보나 도덕성으로 보나 역사에 남은 다른 사람들만 한 높은 위치에 있다고 도저히 볼 수 없다, 그런 점들에 있어서는 석가나 소크라테스를 예수 위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P. 36> 

감정적 요소
사람들이 종교를 받아들이는 진정한 이유눈 이론과는 아무 관게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정서적 이유 때문에 종교를  받아들이고 있다.......... 여러분은 이 기묘한 사실, 즉 어떤 시대든 종교가 극렬할수록, 독단적인 믿음이 깊을수록, 잔인성도 더 커졌고 사태도 더 악화되었다는 점을 발견할 것이다. 누구나 기독교를 철저히 믿었던 소위 신앙의 시대에는 고문 기구를 갖춘 종교 재판소가 존재했으며, 수백만의 불운한 여인들이 마녀로 몰려 불태워졌다. 종교의 이름으로 온갖 종류의 잔인한 폭력이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가해졌던 것이다.      <P.  38>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진보를 저해해 왔는가.
현재 이 순간에도 교회는 자칭 도덕적이러는 것을 강요함으로써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과다하고 ,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고 있다.... 교회는 인간의 행복과 아무 관계도 없는 편협한 행동 규범을 정해 놓고 그것을 도덕이라고 하기 때문에 교회의 주요 역할은 여전히 세상의 고통을 덜어주는 모든 방편의 진보와 개선에 맞서는 데 머문다.  <P. 38>

종교의 기반은 두려움이다. 
종교의 일차적이고도 주요한 기반은 두려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고, 앞서 말한 것처럼, 여러분이 온갖 곤경이나 반목에 처했을 때 여러분 편이 되어줄 큰 형님이 있다고 느끼고 싶은 갈망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그 모든 것의 기초다.. 신비한 것에 대한 두려움, 패배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의 잔인함의 어버이다. 따라서 잔인함과 종교가 나란히 손잡고 간다고 해서 놀랄 것은  전혀 없다,
.. 이 세계를 사는 우리는 과학의 도움으로 이제야 사물을 좀 이해했고 어느 정도 정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가상의 후원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말고, 하늘에 있는 후원자를 만들어내지 말고, 여기 땅에서 우리 자신의 힘에 의지해. 이 세상을, 지난날 오랜 세월 교회가 만들어온 그런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살기 적합한 곳으로 만들자고 말이다.    <P.  40>

우리의 할 일
세상의 선한 구석, 악한 구석, 아름다운 것들과 추한 것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되 두려워하지는 말자, 세상에서 오는 공포감에 비굴하게 글복하고말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 세상을 정복하자.... 죽어버린 과거만 돌아보고 있을게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이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의 지성이 창조할 미래가 죽은 과거를 훨씬 능가하게 될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P.41>


#  럿셀의 책 몇권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지성으로 빛나는 논리 정연한 언어에 무척 감명받았었다. 그중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의 존재가 내 마음에 자리 잡은 세월은 퍽 오래전의 일이다. 나는 때문따문 절에도 다니고 심정적으로는 언제나 불자였으나 홀로 바치는 기도는 공허했고, 뜻 모르고 독송하는 경전은 막막하기만 했었다. 하여 뭔가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기로 맘먹고 있던 차 나의 바람에 꼭 맞춤한 지금의 성열 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공부가 깊으신 스님 덕분에 불교 교리 공부에 상당히 열의를 가졌던 그 시절은 30여 년 전, 1990년 경으로 거슬러간다. 어느 날 법문 중 스님께서는 종교의 역할은 중생이 무명을 깨고 지혜를 구하도록 도와야 하는데, 공포심을 안겨 주어 종교에 굴복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요지의 법문을 하셨다. 이것은 공포종교이고 이 사상은 이미 럿셀의 '나는  왜 기도교인이 아닌가?'라는 저서에서 지적된 내용이라고 덧붙이셨다. '공포종교'라는 말에 크게 공감한 나는 교보문고로, 서울문고로 럿셀의 그 책을 구하러 다녔지만 지금은 절판되어 나오지 않는다는 말만 들었다. 이후 어느 날 스님과 대화 중 그 책은 오래 전에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더라고 지나가는 얘기로 말했었는데, 스님께서는 자기가 예전에 읽으셨던 바로 그 책, 문고판의 아주 누렇고 낡은 책을 빌려 주셨다. 
문고판의 책은 종이를 아끼려는 의도였는지, 휴대하기 간편하게 만들 목적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젊었던 시절에는 그런 문고판 책들이 많았었다. 스님께서 주신 그 책 역시 깨알 뿌린 듯 잔 글씨로 가득했고, 스님께서 붉은 색, 검은색 볼펜으로 밑줄 그으시면서 읽으신 흔적이 오롯했다. 더구나 비좁은 아래위 여백에는 자기만의 메모가 암호처럼 박혀 있어, 출가 후 열심히 공부하시던 젊은 스님 모습을 사진 보듯 바라보았었다. 

책은 읽고 돌려 드렸는데 그 책은 내 마음에서 아주 떠나질 않았다. 그런데 몇해 전 신간 서적 안내에서 우연찮게 귀에 익은 이 제목을 발견하게 됐고 교보문고에 주문해서 바로 받아 두었었다. 사 둔 책은 묵혀두었다 찬찬히 보겠다는 핑계로 미뤄두고, 도서관에서 대출해 온 책들 먼저 보는 내 습관 때문에 또 세월을 보내다 이제야 읽었다. 시간이 지나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 책이고, 진리는 신선하고 영원한 것이며 언젠가는 빛이 되어 우리를 비춘다는 생각을 했다. 페이지를 펼치면서 지난 세월 들어뒀던 법문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줄지어 떠올라 행복한 마음으로 읽었다. 지금은 건강이 나빠지셨고, 그래도 공부는 아주 놓지 않고 계신 우리 스님의 쾌유를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이 책을 읽었고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