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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을 끄고, 영원한 잠에 드시니.

수행화 2022. 12. 22. 00:02


12월이 꽁꽁 얼고 있었다. 기상이변의 여파로 전 지구가  혹한에다 폭설에다 힘든 겨울이 닥칠 것이라는 뉴스가 넘실댔다. 생각이 바빠지는 이 세모의 시간에 기상 이변보다 더 매서운 비보가 우리 집에 날아들었다. 큰 올케 언니가 졸지에 유명을 달리하신 것이다. 지병도 없으셨고, 일상을 독립적으로 건강하게 유지하셨으니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얼마 전 전화 통화에서도 이 해 가기 전에 얼굴 한번 보도록 하자시어 여전히 무탈하게 보내시구나 여기면서 차일피일 시간을 미루던 나는 바로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그 또렷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고, 미처 다하지 못한 말마디들이 내 안에서 끓어 넘쳐 마음도 몸도 심하게 떨었다.

전라도 지방에 폭설이 내렸었고, 중부 지방에도 눈발이 쉬임 없이 뿌리던 날, 우리는 언니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아름다운 설경은 이별 의식의 장엄한 배경이 되어 주었고, 눈 덮인 기억을 마지막 선물로 남기고 언니는 사진 속의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가족이 되어 60년이 넘는 세월을 대과() 없이 살았고, 나란히 늙어가고 있었다. 이제 그  일희일비하던 세월들은 과거로 편입되며 잊혀져 갈 것이다. 크고 작은 기억들이 긴 잠에서 깨어났나 싶게 불현듯이 선연하게 드러난다. 나는 나와 함께 사라질 이런 기억들을 조금이라도 주워 담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언니, 오빠가 결혼식을 마치고 신행하던 날 우리집 잔치는 참으로 대단했었다. 큰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친척들, 신부 측 상객으로 신부와 동행하신 언니의 친척분들 그리고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온 하객들이 집 안팎을 말 그대로 입추의 여지없이 메웠었다. 물론 우리 방도 손님들 차지라 나는 건너 집 앞에 앉아 우리 집을 바라보고 오래 앉아 있었다. 새언니 맞이가 좋기도 하고 방을 빼앗겨 심사가 조금 불편하기도 했었던 기억이 있다. 손님 접대에 정신없이 오가시던 어머니가 지나다 말고, "우리 새끼 밥도 못 먹였네"하는 말에 설움이 복받쳐 눈물을 쏟았던 장면이 떠올라 우습기도 하다.
손님들은 끊임 없이 들고 났으며, 여자 손님들까지도 밤이 이슥하도록 신부를 에워싸고 앉아 권커니 잦커니 해가며 도무지 자리 뜰 기미가 없었다. 급기야 신부의 노래 한 곡조 들어보자는 소리가 터져 나왔고, 거듭된 청에 떠밀려 언니는 그 자리에 서서 노래를 불렀다. 방 구석에 처박히듯 쭈그려 앉아 있던 나는 언니의 목소리를 노래로 처음 들었다. 가늘고 낭랑한 목소리로  새언니가 부른 노래는 '등불을 끄고 자려하니.....; '달밤'이였다.

"등불을 끄고 자~려 하니 휘영청 창문이 밝으오. 문을 열고 내어다 보니이, 달은 어여쁜 선녀같이......."
60여 년 전의 언니 노래를 지금 떠올려 보니 성악가 윤 심덕의 창법에 가까웠지 않나 싶다. 어린 나는 -초등학교 3학년?-  홍콩 양단 한복을 입은 언니의 모습이 좋았고, 가늘고 여린 조용한 노래가 좋았다. 노래가 왁자한 분위기를 어느 정도 잦아들게 하던 느낌도 좋았다. 그때 그 시절의 결혼식 피로연의 일화를 재생해 보니 전설같다. 어린 시누이 둘을 위해 예단으로 준비했다는 노란 명주 저고리의 기억도 빛바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이 되었고, 또한 언니의 부지런하고 담대한 제2의 인생도 시작되었다 하겠다. 

큰오빠의 결혼식을 깃점으로 집안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갔던 것도 같았다. 우선 오빠가 연애결혼을 감행하며 변화의 조짐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그즈음에 우리 집 안방에는 신붓감 사진이 몇 장씩 오빠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사진 속의 그 아지 못할 분들의 얼굴이 기억에 있다. 그러나 오빠는 좋은 사람과 사귀고 있으니 결혼을 승낙해 달라는 긴 편지를 아버지께 보냈고, 물론 나도 읽었다. 무척 총명한 여자이니 좋은 자손을 얻을 것이라는 내용만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흰 면사포를 쓰고 신식 결혼식을 올린 것이 상당히 멋져 보였다. 곧 크고 작은 사이즈의 결혼식 흑백 사진이 우편으로 부쳐 왔고, 그중 닳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아주 자주 그것도 뚫어지게 오래 보았던 사진 한 장이 있었다.결혼식 날, 신랑 신부의 퇴장 장면 스냅사진으로, 오빠의 안경 낀 얼굴만 보이고, 옆의 신부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꽃다발을 안은 모습의 신부는 얼굴이 온통 종이테이프로 감겨 이목구비는커녕 얼굴 윤곽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시간만 나면 얼굴을 찾겠다고 숨은 그림 찾듯이  애를 썼었다. 그때 왜 그렇게 일 삼아 찾으려 했던지 모르겠고, 지금은 웃음만 터져 나온다. 

이후 언니는 빠르게 우리 가족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전기다리미를 들여왔고, 미제 캔 버터와 치즈가 밥상에 오르는 일이 일어나는 등, 신식 물을 길어다 날랐던 것 같다.
정전이 잦던 그 시절에도 우리 집은 집 앞 전봇대에 단독의 변압기가 설치돼 있어 전기 사정이 좋았다지만 그 전기다리미는 조금만 오래 쓰면 두꺼비집 퓨즈가 나가버리곤 했었다. 본체와 다리미 부분이 분리되어 모양부터 거창했던 그 다리미는 전력 소모도 많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버터밥은 우리 남매들의 추억의 메뉴에 어엿하게 들어있다. 밥이 뜨거울 때 가운데 부분을 살짝 떠 동그랗게 자리를 만들고, 버터를 한 숟갈 넣어 녹이면서 간장에 비며 먹거나 김에 싸서 먹기를 아주 좋아했다. 그리고 방학이 가까워 올 때면 나는 오빠에게 책을 사다 달라는 편지를 썼고, 언니는 성의껏 큐리 부인, 알프스의 소녀, 슈바이처 등 책을 사다 주셨다. 한 번은 시집을 사다 달라는 내 부탁에 어른들 시집처럼 판본이 작고, 글자체도 작은 '동시교실'이라는 책을 받아 어른스럽고 멋지다는 생각에 아끼기도 했었다. 훗날 도리켜 보니 신혼살림에 크게 마음 쓴 선물이었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 나의 철없음을 깨닫기도 했었다. 부지런하고 솜씨 좋은 언니는 방학 며칠을 집에서 지내면서 바느질을 했고, 일본책을 보면서 내게 원피스를 만들어 입혔었다. 상당히 큰 꽃무늬가 프린트된 면직물에 흰 스탠드칼라가 어깨를 덮는 튀는 디자인이었고, 나는 좋아라 입고 다녔었다. 그런 순수시대를 살았고, 시절 따라 희비와 곡절의 시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또 살아냈다.

내가 학교를 마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세월에 이르러 우리는 각자 몫의 인생에 열중했고 나는 친정집과 조금 소원하게 지내려 나름 노력했었다. 그것이 언니를 도우는 길이며, 나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내 고통을 들키지 않을 것이며 전염시키지도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음이 자라기도 전에 멋 모르고 결혼을 했고, 방향키 없는 배에 오른 형국에 처했다. 풍력에 떠밀리고 격랑에 휘말려가며 인생이 데려다주는 매 순간에 순응하느라 심하게 멀미를 했으니, 그런 내 모습에 누군가  연민심을 일으킨다는 것이 무엇보다 싫다는 생각이 강했었다. 

더디게 혹은 빠르게 흐르던 시간에 나는 조금씩  철이 들어갔다. 철벽을 쌓으려던 내 침묵은 탄력을 잃어갔고 마음에 언 얼음장을 홀로 깨어가며 낮고도 낮은 자리로 나를 이끌어 갔다. 가끔 친정에 얼굴을 디밀 때 언니가 흘리던 몇 마디 말에서 언니의 진심을 읽었고 고마운 기억으로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고모를 보면 내 젊은 날을 보는 것 같아." "고모와 똑같은 환경에 처하면 살아낼 사람은 정말 아무도 없을 거야" 위로받을 자세가 안 돼 있는 나에게 크게 보내는 위안의 말이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어도 묵묵부답했고, "아이들 방학인데 외할머니도 계시니 집에 며칠이라도 보내라"는 제안에  내 속마음을 읽어 준 언니의 마음씀에 상당히 감동받았으나 그저 건조하게 고맙다고만 했을 뿐 살가운 대답을 한 기억은 없다. 인내와 침묵이 내 다른 이름인 듯 살던 일상의 습관 탓이었을 것이라며 미안한 마음을 혼자 덮어본다. 뒤돌아 보면 감정은 빠르고 이해는 늘 늦게 도착한다. 우리의 인생은 한 과목을 익히고 나서 다음 과목을 습득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걸 예전에 알았더라면....  

우리가 인연이 되어 더불어 살아 낸 세월이 결코 평온하고 밋밋할 리는 없다. 부대끼고 뒤척이며 행복을 가장해 가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우리들 관계를 총평할 수는 없으나 나는 큰 오빠와 큰 언니라는 지위를 존중했고 배려하려 했던 것 같다. 무거운 일에서 가벼운 일까지 전면에 서 있는 언니의 모습을 무언으로 응원하며 살았었다. 바다가 평온하면 유능한 뱃사공을 키울 수 없다는 말이 그저 나온 것이 아니다. 8남매의 맏이로서 긴 세월을 어머니를 모셨고, 아울러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친인척들의 삶과 유기적인 관계를 잇고 지내던 오빠의 배경으로서 언니는 냉정과 온정을 오가며 잘 헤쳐 나갔던 것 같다. 나는 다만 그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없는 하나의 가지이기를 소망하며, 언니의 영광과 고뇌의 시간들을 지켜만 봤다.

코로나가 발발하기 직전, 12월 우리는 선릉역 앞 작은 호텔에서 만나 점심을 먹었다. 바쁘다며 모두 헤어지려는데 언니는 한사코 나와 차 한잔 더 하자고 붙잡으셨다. 생각해 보니 언니와 나 단 둘이 만나 깊은 대화를 한 기억이 없었다. 그날 커피숍에서 오래 나눈 대화가 그러니까 처음이었고,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었다.
"고모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어" 라며 운을 뗐고, 나는 영문 모른 채 갑자기 먹먹해져 듣고만 있었다. "오늘날까지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에게 서운했던 일이 왜 없었겠어, 또 싫었던 일이 어찌 없었을까만 고모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싫은 말을 하거나 언짢은 내색을 하지 않았어. 내가 그걸 어찌 모르겠나. 늘 고맙게 생각하고 살았고 이 말을 꼭 한번 하려 했었는데 기회가 없더라고" 라며 속마음을 아주 찬찬히, 힘주어 길게 털어놓으셨다. "그래서 얘기인데 마음에 맺힌 말이 있다면 풀어주고, 서운했던 일이 있었다면 잘 이해해 줬으면 해." 그리고 아울러 젊은 시절 나의 인생을 발전적으로 이끌어주지 못했고, 응원하지 못했던 것에  미안한 마음이 컸고 지금까지 애석하게 생각하노라는 얘기도 또 길게 하셨다. 그때 우리가 다 그렇게 살았었노라고, 모두들 제 앞가림에 급급해 한 치  앞의 미래도 내다보지 못했으니 후회로 남는다는 말을 거듭하셨다.
말 마디마디는 제대로 나의 누선을 자극하는 지점이었으나 나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데면데면하게 들으려 몹시 애를 썼다. 심호흡을 거듭해 가며 천장을 바라봐 가며 잠자코 들었다. 혹시 언니가 건강이 나빠 주변 정리를 하려나 하는 걱정이 덜컥 치밀어 정신이 번쩍 들기도 했었다. 우리는 그저 마주 보고 웃었으니, 말 그대로 '이심전심 염화미소'의 순간이었다.
눈물을 마음에 담고 또 쓸어 담으며 집으로 돌아왔었다. 언니는 자기가 진 마음의 짐을 조금 부렸놨을 것이고, 나는 나대로 나 홀로 거쳐 온 절대 고독의 시간들에 조금 보상을 받은 느낌을 갖기도 했던 날이었다. 도리켜 보니 그날도 나는 언니의 진솔한 말에 끝까지 귀 기울이며 오직 들었을 뿐, 오랜 세월 마음 썼던 일에 작은 감사의 말도 차마 하지 못하고 말았다. 시간은 장대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또 기회를 줄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날을 오로지 언니의 시간으로 미루어 주고, 내가 사족을 달지 않은 것이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니 마음이 가벼워졌으면 된 것이었다.

시간의 운영자로서 언니는 자기 몫의 사명에 충실하려 노력하며 잘 살아 냈다 말하고 싶다. 언니를 마주 보며 했다면 좋았을 말을 나는 지금 뒤늦게 하고 있다. 이렇게 나는 또 한 분의 언니를 보냈고, '노인 한 분이 돌아 가시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에 속절없이 공감하는 처지가 되었다. 언제라도 전화하면 반갑게 받아 소소한 의논들을 스스럼없이 주고받던 날들은 이제 없다. 지금껏 언니가 버텨 주던 어른이라는 팽팽한 버팀목이 툭 소리 내며 넘어지는 걸 느낀다. 먼 미래일 줄만 알았던 어른이라는 큰 이름이 훅 나에게 닥치는 걸 본다. 한편으로는 후일에 나를 추억할 사람들을 떠 올리니 정신이 아뜩해진다. 좋은 기억을 남기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날들을 살아버렸다. 이제 산에 오르면 그 높음을 배우고, 물에 이르면 그 맑음을 배우는 낮은 자세로 나머지 날을 배움에 써야 하리라는 생각은 한다.

장례식 날 내내 눈이 내렸고, 성당에서도 장례미사가 있었다. 나는 혼자 지하철 역에서 내려 성당을 향해 눈 쌓이고 내리는 길을 걸었다. 언니가 이 길을 걸으며 소망을 빌었을 것이고, 마음의 위안을 구했을 것이라는 등 생각에 잠기며 천천히 걸었다. 옛 성현은 '눈 길 함부로 걷지 마라, 네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라고 했다. 나는 마치 언니의 발자취를 더듬듯이 걸으면서 언니가 신실한 천주교인이었음을 새삼스레 상기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불교식 49재를 우리 성열 스님 주관으로 모셨고, 7일마다 행하는 재에 언니는 먼 길을 마다 않고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 일이 내 마음을 적셔왔다. 언니는 자신의 사후 걱정에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절에 위패를 모시자고 먼저 제안하셨으니 이제 나는 내 생이 다하는 날까지 아버지, 어머니 기일을 기억하고 챙기리라며 언니에게 무언의 약속을 했다. 

눈발이 하늘거리는 사이로 사진 속 언니 모습을 마지막 바라보는 순간, 뜬금없이 '등불을 끄고 자려하니...' 노래가  떠 올랐다. 우리 만남의 시작이던 언니의 그 노래가 어떻게  헤어짐의 마지막 순간에 오버랩되어진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어쩌면 우연 같은 필연인지도 모른다. 행복했던 언니 젊은 날의 추억을 노래로 선사하고 싶은 잠재적 동기였을지!
'회자정리'라고, 만남은 헤어짐을 품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그러나 우리 비록 딴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에 이르렀어도, 속세의 인연은 그 명을 다 했어도, 긴 이야기를 써 온 가족이라는 이름의 인연은 저마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강물처럼 흐르고 흐를 것이라 나는 믿는다. 지는 꽃을 보면 그렇게 아깝고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약속하지 않아도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눈물 흘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기약할 수 없는 다음 생의 영원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나는 언니에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작별 인사를  바쳤다. 
"형제 많은 집에 시집오셔서 참 애 쓰셨어요. 편히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