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24년

지상에 있는 도시

수행화 2024. 7. 3. 00:52

"...편지에 그려진 도시는 '안트베르펜'으로 네로와 파트리슈 조각상이 있는 곳이야. ㅎㅎ..."



교환학생으로 벨기에서 지내는 손녀가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엽서에다 손 편지를 써서 보내왔다. 꿈을 꾸는 도시 같은 이 은은한 카드 그림이 '안트베르펜'이고, 우리가 익히 아는 ‘프란다스의 개’ 이야기의 배경 도시라는 말이다. 아니! 가련한 한 소년의 사연을 품은 동화 속의 도시가 이 지상에  존재했었더란 말인가!  책 속에서 애잔하게 글로 가공된 마을이 아니었었다는 것인가!  "... 벨기에 와서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예쁜 걸 볼 때마다 할머니 생각이 나...", 놀라움에 탄식 섞어 다음 문장을 이어 읽으니 비로소 현실감이 생기고, 이 아이가 여행 중임을 상기했다. 

우리 가족에게 '프란다스의 개' 이야기는 남다른 감회의 역사가 있다. 내게 카드를 보낸 이 손녀의 아빠, 나의 아들 어린 시절에 이 동화로 하여 잊지 못할 에피소드를 남겼기 때문이다. 말문이 늦게 터져 은근한 시름을 안기던 아들은 말과 한글을 거의 동시에 깨쳤다는 엄살스런 기억을 나는 갖고 있다. 그 당시 나는 아이들이 미처 글자를 읽지는 못해도 오며 가며 그림이라도 펼쳐 보며 놀라는 뜻으로 다문다문 책들을 사다 날랐다. 그리고 우리 아이 둘은 책들로 집도 짓고 병풍처럼 빙 둘러 담장을 쌓고 신문지를 펼쳐 방도 만들고 해 가며 어쨌거나 사이좋게 고물고물 잘 놀았고 나는 늘 분주했었다. 그런 어느 날, 아이들이 놀고 있는 방문을 여니 아들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욕실의 큰  타월을 가져다가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흐느꼈고  딸은 오빠 턱 밑에 앉아 몹시 난감한 얼굴을 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 놀라운 광경에 "왜 울어? 싸웠니?" 내 이 한마디 말은 순간 바늘이 됐고, 아들의 눈물주머니를 찔러 버리고 말았다. 대성통곡이 터졌고 그치지 않았으니  평소 싸우지 않는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놀라 수습하려 드는데 아들은 꺼이꺼이 외친다. "네로가 죽었잖아! 엉엉엉엉...." 한 번 터진 울음은 걷잡지 못했고 딸은 긴장 풀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 준 건 나중의 일이고 나는 나대로 아이가 책을 읽어냈다는 사실에 어찌할 바를 몰랐고 벅찬 내 흥분을 먼저 추슬러야 했었다. 열심히 집 짓고 놀더니 언제 글을 깨쳤고 책까지 읽었나 싶었고, 더구나 뜻을 이해해서  눈물을 쏟은 거니 어떤 칭찬도 궁색할 지경이었다.
세월이 지나 책을 읽으며 눈물을 쏟던 아이는 아빠가 되었고, 그 아이들이 고만고만하게 자랄 때 나는 이 즐거웠던 날의 해프닝을 재미 삼아 들려주곤 했었다. 오랜 풍화의 빛을 머금은 카드 한 장은 우리들의 전설이 된 아름다웠던 날을 형형하게 되살려 주었다.

새삼스레 찾아보니 영국 출신 작가의 기록도 있고, 벨기에 북부 '플란데런'의 '안트베르펜'이라는 도시가 그 동화의 배경지라고 딱 명시되어 있다. 작중에 등장하는 성모 성당에는 루벤스의 성화가 지금도 보존돼 있으며 성당을 비롯한 다양한 건축물과 유적들이 보존 가치가 크다하여 1999년에 이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도 한다. 1352년 건축을 시작해 무려 230여 년에 걸쳐 완공된 유서 깊은 성당이라는 사실이 엄연해 나의 근거 없는 속단이 머쓱해졌다. 성당이 살아 낸 역사가 시간 속에서 내공으로 깊어져 저렇게 우아한 자태를 지녔나 싶다. 지금은 성당 앞에 네로와 파트리슈의 조형물까지 갖추고 있다고 한다.

손녀가 보낸 카드는 기억 안에서 묵혀 잊힌듯하던 동화 한 편을 꺼내 본 것은 물론, 영민하고 티 없이 자라던 우리 아이들의 어린 시절 어떤 날을 반추해 보게도 해서 아주 행복하다. 불쌍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아들이 그날 흘린 눈물의 본질이었을 것이고, 타인의 슬픔을, 그것도 책을 통해 이해한 생애 최초의 일이라는 점이 이 엄마의 감동 포인트였을 것이다.
이렇듯  인간에 대한 연민심으로 슬픔에 공감하는 섬세함은 따뜻한 정서로 아들의 심중에 내재돼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 따스한 마음의 결은 저의 아이들 가슴으로 흘러들 것을 나는 또 믿는다. 손녀는 아빠가 눈물을 쏟으며  서러이 울었던 소박한 옛 일화를 마음에 새겨가며 그 도시를 걷고, 성당에 들어가서 루벤스 그림을 바라보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대리 감격’의 느낌을 담아 할머니의 상상력에 군불 때고 싶은 심정으로 카드를 고르고 또박또박 글을 썼을 것도 같다. ”나 지금 '프란다스의 개' 책 속의 도시, 우리 가족에게 전설이 된 이야기 속의 성당에 왔고, 할머니에게 보여 주고 싶어“라는 마음이 엿보이는 응축된 문자, 'ㅎㅎ…‘,
문자는 시가 되었고, 나는 행간에서 방긋 아이의 미소도 보았다.

시간은 정직한 외줄이나 우리는 곡절을 입혀가며 빠르게 혹은 느리게 인식하며 긴 인생을 이어 왔다. 아프고 슬펐던 기억은 강렬하고 무거워 마음 바탕에 중량감 있게 자리하지만 작고 오밀조밀한 순간들은 가볍게 무심결에 흘려보내며 살아왔지 싶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실로 나를 보듬어 일으키고 초심을 잃지 않게 부축해 준 것은 단연코 무심하게 흘려 보냈던 작은 행복의 순간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봄 아들도 며느리도 지상에 존재한 이 도시, 안트베르펜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여행은 걸으면서 하는 독서'라는 말이 제대로 맞아떨어졌을 것만 같다. 나는 책 페이지 넘기듯이 여행 사진을 봐가며 아이들 발걸음을 쫓아 봤으니 앉아서 여행을 잘한 것이다. 네로와 파트리슈는 책 속에서 죽었으나 누군가의 추억 안에 살아 있고, 가여운 영혼을 기리며 찾아드는 여행자가 있는 한 슬프지 않을 것이다. 나의 밋밋한 일상에 배달된 행복 한 꼭지를 훗날 찾아 쓰려고 글로 저축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