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차 봄이 사라질 거라느니, 이 여름에는 유례없는 더위가 들이닥칠 것이라느니 해가며 수상한 봄을 타박하는 사이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나의 일상에 남편 입원이라는 급물살이 밀려들었고, 갑작스러운 현실에 어질어질 멀미 중인데, 시간은 나를 사정없이 떠밀어 여기 여름 앞에다 부려 놓았다. 가족의 투병은 모든 걸 하나의 초점에 수렴하는 일이고, 그건 예상 이상의 공포요 혼란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 권태가 아니라 행복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됐다.
딸네 가족이 방학을 맞아 6월에 도착할 예정이니 미리 집안 정리도 하고 무슨 메뉴를 들이대며 아이들을 즐겁게 해 줄까 궁리하던 지난날의 방학맞이는 상당히 낯선 과거로 느껴진다. 이 와중에도 환자 모습이 역력한 할아버지의 변화에 아이들이 상처받고 주눅 들까 봐 언짢은 마음이 그득하다. 애들 얼굴 본다는 밝은 기분을 장착해 보는 것도 잠시, 다시 걱정 모드에 드니 더욱 우울하다.
매년 여름 방학이면 외국에 나가있던 자손들이 할머니 댁을 방문하여 얼마간 함께 지내는 가정이 삼이웃에 널려 있어 진풍경도 아니다. 그러나 가족 상봉의 기쁨도 잠시,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한 더위 손님 맞이에 집집마다에 크고 작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도 흔히 듣는다. 딸은 미국에 살면서 임신 중 입덧하던 때를 시작으로 큰 아이 돌 잔치를 비롯하여 거의 격년으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으니 방문이 잦은 편에 속하지 않았나 싶다. 몇 해 전 딸이 아이들 여름 방학을 꽉 채우고 떠나고 난 어느 날 며느리가 하던 말이 있었다.
"저는요, 가는 데마다 어머님 얘기를 꼭 해요. 딸 식구들을 여름 내내 먹이고 재우고 하며 힘이 드실텐데도 힘든 내색 한 번 안 하신다고요... 그 말은 꼭 해요."
저는 말하고 잊었겠으나 나는 칭찬의 말로 들어서인지 가끔씩 생각이 난다. 다만 함께 지냈을 뿐, 내가 띨네 가족을 대단한 각오로 칙사 대접한 것도 아닌데 애들 눈에 그렇게 비췄다니 고마운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올해는 예년과 사정이 다르게 우리 집 시계가 할아버지에 맞춰 흘러가고 있으니 모처럼 외갓집 온 아이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반기는 마음에 그늘을 지운다. 하지만 아이들도 이제 가족 사랑도 상호적이라는 걸 알아갈 만큼 자랐지 않았나 하면서 생각을 고쳐가고 있던 중, 며칠 전에 딸과 통화를 하게 됐다.
변모한 할아버지 보는 것도 그렇고 집안 분위기가 예전과 사뭇 다르니 아이들 놀랄까봐 걱정이라는 말 끝에 그래서 올해 방문을 좀 고려해 보면 어떨까 싶다는 말을 미처 꺼내기도 전에 딸은 자기들은 이미 마음에 채비를 다 하고 있단다. 지난날 할아버지의 사랑을 넘치게 받았으니 지금 할아버지가 어떤 모습이시든 괴로워 말고 즐겁게 해 드리고 오도록 하자는 따위의 결의 같은 걸 했다는 것이다. 내가 뒷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딸이 덧붙여하는 말,
"우리는 그 추억으로 몇 년을 먹고사는데....."
"엄마, 김치찌개를 아예 들통에 끓이면 어때? 냄비에 끓이면 금방 먹어치워 엄마 힘들잖아..." 웃기는 아이디어를 제법 진지하게 말하는 것은 또 그만큼 절실하다는 것으로 이해가 됐다. 까짓 그게 뭐라고, 매일 끓여 준다. 할머니표 비빔밥, 외갓집 자체 생산 요플레, 뭐 다해 준다.
아이들이 외갓집 바라기일 세월도 이제 서서이 끝나게 될 것이라는 걸 미리 생각하고 있다. 두 팔을 한껏 올려 균형을 잡으며 쓰러질 듯 걸음마를 하던 돌박이 아기가 헌헌장부로 자라 대학생이 되어 자립하게 된 작금의 세월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지금이 어느 시절인가! 외갓집 가고 싶고 친정 그리운 구닥다리 시대가 아니지 않은가! 전 세계가 놀이터이고, 추억 가공소가 아닌가! 그런데도 부푼 마음으로 외갓집에 오는 아이들이 어여쁘고 소중하다.
그런데도 어린 시절 외갓집을 기억하며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을 더러 보긴했다.
인상적인 것으로는 미국 작가 '빌 브라이슨'이 미국횡단 여행을 하면서 외갓집을 찾아가 보는 부분이 있었다. 그곳에서 보낸 각별했던 여름방학을 회상하는 장면을 나는 우리 손주들 생각하며 읽었었다.
외갓집이 그럴진대 하물며 친정집은 오족하랴!
아기를 키우고 나이가 제법 들 때까지 몸과 마음이 몹시 고단할 때면 나는 어김없이 친정집을 아쉬워했었다. 내게 위로와 양질의 휴식을 제공해 주고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그런 친정집을 말이다. 사실 친정어머니, 오빠와 동생이 가까이 살아 음으로 양으로 관심을 받아온 내가 할 생각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위로, 무심히 짐을 내려놓고 무장해제를 하고 큰 대(大) 자로 드러눕게 하는 그런 친정집, 사실 그런 집이 있기나 할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런 어쭙잖은 망상을 가졌던 나는 지금 친정엄마의 이름을 갖고 살고 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딸을 향한 애잔한 마음을 바탕에 깔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편한 저희 집 두고 친정집 단조로운 공간에서 볶닥이며 보낸 시간들을 추억의 재료로 우려서 먹고 사나 보다 하니 짠하기가 그지없다.
예전에 시고모님께서 하신 말씀도 생각난다. 자기는 누구라도 친정 간다고 하면 그게 그렇게 부러우셨다고 하시면서 서울 오시면 친정 조카인 우리 집에 하루 이틀씩 묵고 가셨다. 바로 이웃 동네에 자기 딸이 살고 있는데 자기는 친정 가보는 게 좋아서 우리 집에 오신다고 하셔서 그 마음을 이해해 드렸던 생각도 난다. 높으신 연세에도 친정이 그립다 하신 걸 보니 친정집이란 애절한 그리움 자체인가 싶었다.
우리 세대는 결혼이란 자신의 권리를 절반으로 줄이고 의무를 배로 늘리는 제도라는 명언을 알기도 전에 이미 그런 세월을 살아냈다. 그런데 조금만 거슬러 뒤돌아보면 딸에게 몹시 가혹했던 우리의 역사가 엄연히 있었다. 출가외인이라는 별명이 말해주고, 뒷깐과 처가는 멀어야 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던 시절은 가까운 과거이다.
언제인가 ‘반보기’ 풍습과 ‘만날 고개‘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시집살이하는 딸과 친정어머니가 어느 지정된 장소에서 만나 얼굴 보고 음식도 나눠 먹고 헤어지는 날이 있었는데 반나절만 본다고 하여 ’ 반보기'라 일렀다는 것이고 또 어느 지방에서는 주로 고개 마루에서 모녀 상봉이 이루어져 그 장소가 ’만날 고개‘로 이름 지어졌다고도 하였다. 전설 같고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딸의 운명을 쥐락펴락하며 권리를 포기하게 하던 시대를 우리의 할머니들이 살아낸 것이다.
우리 자식들은 행복을 안고 태어났다. 태어나보니 살만한 세상이 열려 있었고 저의 부모 세대가 조상의 무지와 완고함에 과감히 맞서는 한편 땀 흘려 과일나무를 키웠고, 저들은 그 과실을 먹으며 자랐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속성이 있다고 했듯이 우리 자식들 미래에 더 엄혹해질 세월은 오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역사책에 실릴 것 같은 고리 적 애환의 모녀 상봉에 비하면 궁리도 않고 딸네 가족 맞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다. 이번에는 저희들끼리 알아서 몇 년을 먹고 살 추억을 챙겨 가도록 지켜봐야겠다. 자체 발광(發光)하는 위력의 친정집은 못 되어도 은근한 조명의 외갓집은 되도록 노력하려 한다. 지속되는 것이 가지는 힘을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