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2년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

수행화 2012. 7. 28. 00:44

오랜만에 정 채봉 시인의 수필집 한권을 읽었다. 

 

"풀잎은 왜 나에게는 꽃을 얹어 주지 않았냐고 불평하지 않았다.

풀잎은 왜 나는 지천에 널려 있는 평범한 존재냐고 투정하지 않았다.

해가 뜨면 사라져 버리기는 하였지만 이슬방울 목걸이에 감사하였다.

때로는 길 잃은 어린 풀무치의 여인숙이 되어 주는 것에 만족 하였다.

.....

어느 날 산새가 날아와서 검불을 물어 갔다.

산새는 물어 간 검불을 둥지를 짓는데 썼다.

그리고 거기에 알을 낳았다.

산바람이 흐르면서 검불의 향기를 실어 갔다.

무지개에까지.

 

풀잎의 겸손하고 선량한 향기는 무지개에게로, 또 내게로...

전율과도 같은 가벼운 현깃증이 실려 오더니 머리 위로 서늘한 비가 내린다.

풀잎은 내게 낮은 목소리로 작은 성찰의 시간을 구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정 채봉 시인의 글을 샘터를 통해 많이 읽어 보았건만 이제야 내게 의미가 되어주니 차마 민망하기도 하고, 그래서 더 소중해진다.

나는 어느듯 공손한 눈이 되어, 때로는 작은 꽃의 시선으로,  혹은 나비의 마음이 되어 보며 시인의 소리에 귀 기울이니 실낱같은 바람에도 사정 없이 흔들리는 또 다른 검불, 내가 바라 보이는 것이다.

 

나는 해바라기 얼굴을 꿈꾸는 채송화가 되어 내 영혼을 힘들게 하였으며,

100ºc로 끓어 마침내 수증기로 거듭나고 싶어 하면서 연료를 공급하지 않고 있던,

그래서 지금껏 맹물일 수밖에 없는 나를 돌아 보게 한다.  

 99ºc까지 끓어 오른 물도 나머지 1ºc가 부족하면 완전한 100ºc 의 수증기가 되지 못하는데 말이다.

도리켜보면 나는 저절로 끓어 오르기를 바라는 맹물이 아니었던가.

  

광야로 내 보낸 자식은 콩 나무가 되었고

온실로 들여보낸 자식은 콩나물이 되었다는 콩씨네 자녀 교육 얘기.

우리는 아이를 온실에 넣지 못해 전전긍긍하며 지나 온 것은 아니었을까?

소박하고 간명한 말 속에 담긴 커다란 의미가 또 가슴에 손을 얹게 한다.

 

사랑에도 의심이라는 암균이 있고, 사랑에도 믿음이라는 항암제가 있다는 것 또한 범상치 않은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동화. 주인공은 옷걸이.

세탁소에 갓 들어 온 새 옷걸이에게 하는 당부의 말.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 하시는지요 ?

“잠깐씩 입히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 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 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옷걸이의 어여쁜 부탁을 들으며 혼자 파안하는 나를 보는 것도 즐겁다.

세상에서 가장 짧고, 아름다운 동화임이 틀림없다.

      

탄소 형제의 동화는 또 어떤가?

땅 속으로 들어 가야 할 운명에 처한 탄소 형제 둘 중,

아우는 반항하여 땅에 남았으며,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였으니 훗날 숯이 되었고,

순명한 형 탄소는 순리를 따라 땅 속 깊이 묻혔다가 긴 세월 천둥이며 번개, 폭풍 등 온갖 시련을 이겨 낸 끝에 마침내 다이아몬드가 되어 세상에 다시 나타나게 되었더라는 탄소형제의 이야기.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또 세월을 기다리지도 않으면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련만

우리는 늘 하릴 없이 분주하고,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듯 화급하게 구하려 하니,

숯은 우리의 자화상이라 여겨져 홀로 쓸쓸할 따름이다.   

                                                                                                                           

까치네의 부부 싸움 얘기.

“우리들은 기쁨을 까치까치까치 하지요.

마찬가지로 불평도 까치까치까치 하지요.

이 기쁨과 불평도 한 입에서 나오는 것이지

다른 귀신이 시켜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문제는 나한테 있는 것입니다.

다만 기쁨은 첫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반해

불평은 묵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 둥지를 틀던 첫 마음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면 불평은 걷히고 기쁨이 나타날 것입니다.

 

처음의 마음, 환희와 기대를 푸르게 담았던 처음의 마음,
시간은 그 신선했던 마음에 불만의 어둡고 남루한 옷을 덧 입히며 깊이를 모를 망각의 늪에 던져 버렸다. 
처음의 마음, 순수의 시간을 길어 올려 보라는 가르침이 담뿍 담긴 글이다.

사물을 보며 동화적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는 차마 따를 수 없는 작가의 역량이어서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잠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일 것이다.  

작가는 들꽃 하나 풀벌레 하나, 세상의 모든 작은 생명들을 향해 오랜 시간 따스한 시선과 사랑을 보냈을 것이며, 그래서 그들은 고운 글로서 화답하게 한 것이리라 믿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