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2년

'인연' 최인호 에세이.

수행화 2012. 8. 30. 01:48

내 영혼에게 가만히 가자고 속삭이는 순간

첫 페이지를 펼쳐 눈에 들어 온 말이다. 소년같은 웃음으로 가족 이야기를 즐겨 쓰던 작가의 글이 비장하게 들려 조금 슬퍼진다.

 

점잖은 사람들은 점잖게 숨지며

그들의 영혼에게 그만 가자고 속삭인다.

임종을 지켜보고 있던 슬픈 어린 벗들이 숨이 졌다 아니다 말을 하고 있을 때

그처럼 우리도 조용히 사라지세나.

눈물의 홍수나 한숨의 폭포도 없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알린다는 것은

이별의 기쁨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영국 시인 '존 던'의 시를 인용하면서 시인은 스스로의 영혼에게 죽음은 이별이 아니라 타이르고 있다. 이제 그만 가만히 떠나자고 영혼에게 속삭이고 있다니.....적막이란 가슴에 새소리가 쌓이는 것이라 말하는 작가의 고독이 바로 읽혀지니 슬프다. 작가가 투병 중에 인연을 생각하고 쓴 글일터이라 스치는 바람결로 무심히 들리지는 않는다.

 

겸손하고 소박하기까지 한 문장을 덮고 홀로 인연이란 운명같은 말을 함께 생각해 본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듯이, 우리들은 밤하늘의 은하와도 같이 무수한 인연을 짓기도 하고, 더러는 별똥별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 어둠에 묻히듯이, 사라져 잊혀지기도 한다. 어쩌면 한 없이 질길 수도 있고, 찰나의 것일 수도 있는 그런 것이 인연이 아니런가 생각해 본다. 그래서 나와 이 책과도 짧은 인연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크고 작은 인연이 따로 있는 게 아닐 것이나, 다만 우리 마음이 인연 마다에 거리를 매겨 간직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유쾌한 인연의 기억은 적고, 외면하고 싶은 인연은 질기고도 집요하게 우리를 엮어 지배한다는 우울한 감정에 사로잡힐 때가 많이 있다. 머피의 법칙?  

 

마당에 무심히 피고 지던 흰 목련도 어느 날 우리들의 가는 눈매에 들어 오면 새로운 인연처럼 가까이 느껴지고, 늘 거기 있던 모과나무도, 나무를 보았으되 나무를 보지 못하다가 어느 날 모과가 곁에 와서 향기를 선사하는 순간 모과나무도 정다운 인연이 되어지듯이,

풍경과 친해지려고 생각하고부터 작가는 곁에 그렇게 서 있던 작은 인연을 알아 보기 시작하였다고 고백한다.

 

우선 순위라는 말의 진정성 에 얹어 둔 일화에서 찡한 감동이 전해 온다.

1980년대 말의 일로, 오사까 여행 중 백화점으로 쇼핑을 나간 아내가 해질 무렵까지 돌아 오지 않아 안절 부절해진 마음에 쇼핑가의 큰 길까지 나가 서서 아내를 기다렸다고 한다. 개미떼 행렬처럼 쏟아져 오고 가는 인파 속에서 아내를 찾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

그런데 웬일인가! 그 숱한 군중 속, 먼 곳에서 점 하나가 강하게 눈에 들어 왔고 자석처럼 시야를 잡아 당겼으며, 그 점은 서서이 다가오며 마침내  아내의 모습이 되었다는 것이다반가운 마음에 뛰어 가려다 말고 멈춰 서서 무심하게 한가로이 걸어오는 아내의 모습을 지켜 보며 생각에 잠겼더라는 일화를 소개한다.
저 여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저 여인은 내 아내란 말인가.

김 광섭 시인의 아름다운 시를 생각하게 하는 순간이 아니겠는가!.

 

"저 어두운 거리에 서 있는 저 여인은 광대한 우주, 무한의 공간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 중에서 내가 쳐다 본 별 하나인 것이다. 저 여인은 내가 쳐다 보았으므로 밤하늘에 떠 있는 별에서 내게로 다가와 내 아내가 되었다. 또한 저 여인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별빛을 받아들인 단 한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아내와 나는 '정다운 너 하나나 하나'가 되었고 언젠가는 나비와 꽃송이가 되어 다시 만날 절대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그날부터 아내를 모든 것에 우선하는 고마운 사람 1순위로 서슴지 않고 결정하였노라고 말한다.

넘실대며 흐르는 까마득한 인파 속에서 단 하나의 점으로 눈에 들어오는 기적같은 우연,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마법이 부부가 되게 하고, 눈에 익은 점 하나가 되게도 한다. 이 장면은 영상이 되더니 내게 깊은 울림을 주더니 잔상이 오래 오래 남을 것같다. 천번의 생에 걸쳐 스친 인연이 마침내 부부로 맺어진 것이라고 하여 천생연분(千生連分)이라 한다고 했다. 진정 광대한 우주의 자성에 이끌린 별들인지도 모를 일이다.  우선 순위라는 말의 진정성에 공감을 보내며, 나와 너, 우리는 그렇게 소중한 인연임을 다시 알아 간다.  

 

기억 속에 살던 어린 시절, 학창 시절, 주소가 없어져 버린 살던 집의 추억, 우리가 익히 아는 가족에 대한 사랑.....잘 정돈된 작가의 앨범을 펼쳐보는 친근함으로 작가가 안내하는대로 작가의 살던 집을 구경하고, 함께 피난시절을 지냈던 바다가 보이는 동네에도 초대 받는다. 마음에 담아 두었던 그리운 풍경들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함께 해보며 작가를 다시 이해해 보게 된다.


김 유정의 생가를 방문하고 격해진 작가의 소회에 함께 눈물 지었다.

문학청년 시절 김 유정의 편지를 읽으며 깊이 감명 받은바 있었고, 가난하고 젊었던 최 인호 작가가 엉엉 울며 소설을 써야만 할 것같은 열정을 일깨웠다는 바로 그 편지를 다시 읽으매, 감동이 복받쳐 오른 것이다.

아! 젊은 시절, 불쌍한 가난뱅이로 다시 돌아가서 다시 '일 어 나 고 싶 다' 는 외침을 들으니 뜨거운 눈물이 주치할 수 없이 흐른다. 불쌍한 가난뱅이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절규를 듣게된다. 하찮게 여겼던 날들, 다시 돌아 갈 수 없는 그 시간들을 생각해 본다.  

  

아버지의 유서를 25년 만에 읽으면서 아버지를 다시 생각해 보기도 한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가족의 생계를 얼마나 걱정했던가를 새삼 느끼면서 유언은 아름다운 언어로 남겨야 하겠다는 말을 하고 싶어한다. 두고 가야 할 인연에게 자신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글로나마 전해줘야 하는 일이므로세월이 가도 그들의 가슴에서 영영 잊혀지지 않을 글이기에, 더욱 아름다운 언어로 유언을 남겨야 할 것이라 말하고 있다. 사랑을 담은 모든 언어는 진실로 아름답게 남으리라 여기고 싶다

 

열매가 있는 꽃

열매가 오기 전에 꽃들이 먼저 온다.

그리고 꽃들이 우리에게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꽃이 되어 꽃들을 찾아 가야 한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치는 우리와의 인연을 기다린다. 우리가 그 꽃들의 이름을 불러 주고 우리가 그 꽃들의 언어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들이 어떻게 한 생을 피고 지며 살다가 한 알의 열매로 영글어 자라는 지를, 그 자연의 신비와 우수를 우리에게 들려줄 것이다.”

 

 '별들의 고향' 최 인호 작가의 불교적 취향을 보게되어 깊이 좋아했던 '길 없는 길' '상도' '잃어버린 왕국'.....

오랜 세월 '샘터'에 연재되었던 즐거운 가족 이야기,

내가 몇 작품을 읽었던 것으로 보아 베스트 오브 베스트 셀러 작가임에 틀림이 없다.

작가는 건강을 되찾아 더 좋은 글, 소탈한 글 보여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2012.8.30.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