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6년

'더블린 사람들' 이 보내는 우울 바이러스

수행화 2016. 7. 8. 09:55

 

 

 

지구촌이 좁아지다 보니 우리는 국내외의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보고 듣느라 잠시도 한가할 틈이 없다.

영국의 브렉시트 사건으로 세계인이 혼란에 빠졌다니 장차 우리는 어쩌나 걱정, 터키 공항에서 또 자폭 테러 사건이 발생해서 희생자를 냈다고 하니 남의 일같지 않게 불안한데, 나라 안 소식은 소식대로 TV만 켜면 알기도 혐오스런 사건들을 실시간으로 기를 쓰며 주입시키느라 전파를 쓰고 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정보가 제한된 북한 동포들이 우리들의 극성스런 보도를 접한다면 " 아! 저것이 바로 지옥이로구나" 하며 자기들의 삶에 대단한 안도와 행복을 느끼겠구나 하는 상상들을 해 본다.

 

미담은 간 곳 없고 흉악한 사건 사고들이 넘쳐나고, 그리고 모두들 남탓, 네탓으로 날이 새고 날이 진다.

영화도 마찬가지로, 음산하고 폭력적이고 뭔가 정상을 벗어나 뒤틀리고, 선혈이 낭자해야 흥행에 성공한다는 무슨 불문율이라도 있는 것처럼 만들어져 나오니, 그게 다 악영향이 되어 사회가 점점 어둡고 살벌해 지는 것같아 몹시 언짢은 게 지금의 심정이다.

 

이런 와중에 나는 어디에선가 추천된 도서로 '제임스 조이스''더블린 사람들'을 대출해 뒀었다.

그런데 크로아티아 여행이며 일본 여행을 다녀 오느라 채 읽지를 못해 반납과 대출을 거듭하다 이제야 겨우 마저 읽게 되었다. 내 노고에 상관 없이 근래에 드물게 집중이 안되고 마음이 산란해지는 소설이었다.

 

'책은 취향대로 읽는 것인데' 하며 그냥 덮으려다 말고 마음을 고쳐 먹고 다시 펴기를 몇번 반복해가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었으나 끝가지 어지럽기만 했다. 제목 그대로 사람들의 이야기이건만 단숨에 이해가 안되고, 결론이 없거나 결론을 내지 않는 형식으로 독자에게 부담을 준다.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정해지는 결론에 공감하며 쫒아 읽는 내 독서 스타일이 퍽 몰개성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타성에 젖어 있는 수동형의 독자라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결론이 보이는 소설이 그렇게 마음이 편하다는 걸 이제 알았다.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이라는 도시를 상징적으로 우리가 몸 담은 사회 전반에 흐르는 어둡고 부도덕한 점들을 세밀하게 포착하여 열거해 보려는 했던 건 아닐까 싶게 우울한 이야기들 모음이다.

 

시민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성직자들, 종교적 위선자들,

거리를 쏘다니며 남의 등을 치며 사는 건달들,

학교를 빼먹고 배회하는 아이들,

부패한 정치인, 정치에 대한 조소와 불신,

사회 전체를 마비 시키는 알콜 중독증, 그로 인한 가정 폭력과 아동 학대,

딸의 연주 비용을 미리 받겠다고 공연장에서 소동 부리는 엄마 등 문화적인 저급함,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하는 소년,

사회적으로 성공해 귀향한 옛 친구의 천박하고도 거만한 행동,

그 친구를 보며 자기 현실에 분노하는 주관 없고 소심한 젊은이.

남자 친구와 더블린을 떠나려다 가족의 굴레를 벗지 못해 좌절하는 한 처녀,

죽은 옛 애인의 회상에 빠져 눈물 흘리는 여인을 어이 없어 바라 보는 남편, 
서로에 대하여 온전히 모른 채 살아온 부부를 보게 되는 등,

남 이용하기, 협잡, 막말하기, 의지 박약........그리고 그 저변이 언제나 깔려 있는 경제적 궁핍, 

 

15편의 단편을 이끌어 가는 주제가 내내 이런 식이어서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화목한 가정은 없고, 술 없이 못 살고, 꿈은 좌절되고, 한 없이 궁핍하고, 정치는 부패되어 조롱의 대상이 된 현실. 선량한 도덕적인 가치에 대하여 전혀 무감각한 사람들, 뻔뻔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처신이 올곧지 못한 더블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가슴에 돌을 얹은 것처럼 답답하기만 하다.

 

행간에 더러 섬세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묘사들이 보이건만, 우울한 장면이나 설정에 다 가려져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 나로서는 안타깝기도 했다.

 

"늦가을 저녁 놀의 잔광이 잔디밭과 산책로를 뒤덮고 있었다. 잔광은 또 너저분한 보도들과 벤치에서 꾸벅꾸벅 조는 노쇠한 늙은이들에게 온화한 황금빛 먼지를 소나기처럼  퍼붓고 있기도 했다. 잔광은 말하자면 모든 움직이는 모습들, 예를 들면 자갈길을 따라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는 어린애들과 공원을 가로질러 통과하는 모든 사람 뒤에 드리워져박이고 있었다."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시간 여행을 하고 인간의 삶을 구경하는 등 여러모로 대리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이 100여년 전인 1914년에 발표된 작품이라고 하니 우리는 당시 아일랜드의 시대적인 배경이 어떠했는가를 미루어 짐작해 보게도 된다. 사실 작가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던 나는 한 때 그가 유럽에서 지냈다는 걸 이번 크로아티아 여행에서 알게 되었다.

크로아티아의 작은 도시 '풀라', 구도시 한켠의 작은 커피숍 노천에 뜻밖에도 그의 동상이 있어 무척 의아했는데, 그는 유럽을 떠돌던 중 그곳에 얼마간 살았고 자주 드나들던 장소라 기념하는 것이라고 했다.

 

꿈을 꾸지 않는 더블린 사람들, 그 절망의 끝이 어떠하며, 더블린 사람들이 얼마나 도덕적 마비에 빠져 있는지를 그리면서 작가는 자기가 고향을 등져야 했던 필연적인 조건이 더블린 사람들에 있었다고 항변하는 것이라 생각해 본다..  

 

'가슴 아픈 사고'편에서

"그에게는 마음을 나눌 동료나 친구도 없었고, 교회도 신조도 없었다. 그는 타인과의 소통이라고는 일절 없이 오직 자기만의 정신적인 삶만 살았다. 크리스마스 때 친척들을 방문하고 또 그 친척들이 죽으면 묘지까지 바래다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죽은 자' 편에서

죽은 애인을 생각하는 아내에 대하여 애정과 애정의 허망함을 동시에 느끼며 그는 말한다.

그리고 배신이 넘실대는 세상을 벗어나야겠다는 의지가 군데 군데 보인다.

"하나씩 하나씩 그들은 모두 다 유령이 되어가고 있었다. 노쇠하여 기운이 빠져 쓸쓸하게 시드는 것보다는 명예로운 정열이 한창 넘칠 때 대담하게 저 세상으로 사라지는 것이 훨씬 나으리라."

"그에게는 서쪽으로 여행을 시작할 때가 온 것이다.`

 

"앙상한 가시 나무 위에도 눈은 바람에 나부끼며 수북히 쌓이고 있었다. 그가 눈이 온 세상에 사뿐히 내려 앉는 소리를 듣고 있는 사이에 , 그리고 그들의 최후의 종말의 강림처럼 눈이 모든 산 이와 죽은 이들 위에 사뿐히 내려 앉는 소리를 듣고 있는 사이에 그의 영혼은 서서히 스러져갔다."

 

"영혼이 무미 건조한 케이플 가의 무미건조한 촌스러움에 반기를 들었다.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성공하고 싶으면 멀리 떠나야 한다는 것을. 더블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그는 그것을 시심이라 생각했다.

우울성이 자신의 기질의 지배적인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신념과 체념, 그리고 소박한 기쁨이 되풀이됨으로써 차분해질 대로 차분해진 그런 우울성이었다그것은 자기와 비슷한 심성을 가진 소수의 계층에게는 호소럭이 있으리라, 아마도"

 

작가는 더블린을 먼 발치에서 바라 보며, 방관자적 입장에서 글을 썼지 않나 싶다.

우울할대로 우울해져 차라리 차분해진 상태로 말이다.

어쩌면 소설 속에는 희망 없는 사람들만 가득하고, 그들의 정신을 깨워 주거나 연민하는 분위기는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으니 작가는 더블린을 향한 어떤 애정도 없는 것이라 보여지기도 한다.

 

그런데 더블린 사람들의 명예에 손상을 입히는 고발성의 소설을 그렇게 세밀하게 썼건만 그는 이 시대에 더블린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로 융숭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하니 조금 아이러니하게 들리기도 하고, 아일랜드인의 문학적 식견이 높다는 생각도 해 본다. 아일랜드 지폐 10 파운드에 그의 초상이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만 보아도 그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어쨌거나 피로하고 우울하게 더블린 사람들의 인생을 들여다 보았다. 100년 전 아일랜드 배경의 소설에 깊이 빠져 들어 우울했다고 하기에는 조금 엄살일테고, 나는 다만 그때 그 시절의 어지러운 사회상이 지금 이 싯점에도 변함 없이 곳곳에서 보인다는 것에 애닯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악이 없을 수는 없다. 선과 악은 늘 한몸처럼 더부러 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선악의 개념을 올바로 가지고 있는 한 악은 한계에 부딪친다고 나는 생각한다. 죄악을 인식하고 저지르면 괴로움이 있어 깊이 빠져 들지 못하지만, 선악의 구분이 마비되면 판단이 흐려져 악은 제어되지 않아 인간을 추락하게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알고 지은 죄가 모르고 모르고 지은 죄보다 차라리 나은 경우라 설명이 된다. 

더블린 사람들은 죄의식이나 도덕적인 개념이 온통 마비된 까닭에 인간의 품위를 잃었으며, 추락하는 삶에 궁핍은 질기게 따라 다니니 그 절망감이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이다.    

 

나는 작품성을 떠나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성실하면 훗날 댓가가 있고, 착한 끝에 행복이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 애쓰며 사는 보통 사람 대부분은 나와 생각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남으로부터 고통을 받으면, 늘 권선징악을 꾸어다 위안을 받으려 하고, "죄는 지은대로 공은 닦은 대로..." 를 주문처럼 외우면서 울화를 삭히던 세월에서 온 버릇일 것이다. 

  

나이가 들면 면역력이 떨어진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신체상의 면역력보다 심적 통증에 대한 면역력이 훨씬 심각하게 떨어져 작은 자극이 와도 힘부터 빠지고 본다. 고통에 저항할 연료를 이미 소진해 버려 더 이상 에너지 생성이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통증에 면역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이 작은 소설 하나 읽으면서 여실히 드러내 보이고 있다. 깊이 몰입 하지 않았는데도 우울 바이러스에 사정 없이 점령 당해 버린 것 같으니 해보는 생각인데, 

그저 스토리만 쫒아 가며 표면적으로 얄팍하게 책을 읽어 버린 결과일 것이다.

 

실은 더 진화하고, 더 분화된 더블린 사람들의 애환이 현재 우리들 일상 속에 넘쳐 나고 있다는 걸 익히 보아왔으니 화들짝 놀랄 일은 아니건만 그저 그렇게 마음이 무겁다. 그 시절 더블린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그래서 서쪽으로 떠날 시간이 왔다고 느끼는 자의 심상이 오래 마음에 남고 있다.

 

장마철에도 하늘은 잠시 빨래 말릴 정도의 말미는 준다고 했다. 오늘이 그 날이다.

습기로 무거워진 마음도 함께 말려 보자. 무거워진 마음에 몸까지 천근 만근이니.....

답답한 채로 덮은 책에서 빠져 나와 우선 마음에 드리운 안개부터 걷어 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