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8년

'대리 만족의 달콤함'

수행화 2018. 2. 3. 13:11

시간을 도둑 맞은 것같이 1월이 지나가 버렸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추울 것같아서, 눈 조금 쌓인 때는 미끄러울 것같아서, 알레르기 코감기가 꽁무니를 붙잡아서......참 가소로운 이유들로 칩거 비슷하게 어물쩡 거리는 사이 1월은 문을 꽝 닫고 사라져 버렸다.  

1월은 말 그대로 두 얼굴의 달이다. 1월(January)의 어원이 고대 로마의 신 'Janus, 야누스' 에서 왔다고 한다. 야누스는 문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문의 앞과 뒤를 살피려 양면에 얼굴을 가졌다고 하여, 과거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1월의 말이 되었고, 우리 마음에도 그 의미가 전해 온다. 

내일의 날씨 예보를 보고 "음, 영하로 뚝 떨어지네" "저녁 나절에 눈이 온다나봐" "강이 두껍게 얼어 붙었다는군" 하는 식으로, 나는 겨울을 액자에 담아 바라보며, 뻔하고 빈약한 상상력으로 조금 강하게 혹은 다소 약하게 음량이라도 조절하며 감상하는듯 겨울의 무게를 저울질하며 살짝 짧은 2월에 들어섰다.

 

여섯 번의 생일에 제사 한 번으로 촘촘히 채워졌던 1월 달력을 2월로 넘기니, 바로 딸 생일이 코 앞에서 반긴다. 설 마련에 마음 쓰기 전에 이벤트 하나 마저 끝내라는  뜻으로 받아 들인다. 나는 빛나게 근사하지는 않다지만 소박하게 딸 생일을 챙겼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더 마음이 쓰인다.

우리 손녀 둘이 지금 지구 반 바퀴 돌아 미국, 저의 고모 집에 가 있기 때문이다. 새벽 잠을 설쳐가며 공항으로 달려 와 아이들을 마중 했고, 쉴 틈 없이 구경하네 먹네 하며 고모 노릇 즐겁게 하는 것을 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이 또 그 자식들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 하며 사랑스레 돌보는 것이 내 눈에 참 경이롭게 보인다.

 

우리 집 손녀들은 저의 고모와 유난히 잘 지낸다. 고모가 아이들 코드를 잘 파악하고 눈 높이에 맞춰 주어서인지 노는 양이 친구같을 때가 많다. 고모바리기 손녀들은 또 그들대로 어린 동생들 보살피는 품이 의젓하고 늘  지극 정성이다. 아이 넷이 다들 선하고 또 손 놀리며 노는 습관이랑 닮은 점이 많아 더더욱 똘똘 뭉치는 것 같기도 하다. 

아이들끼리 자장에 이끌리듯 서로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것에는 마음 밭을 일군 배경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며느리와 딸이 벗처럼, 때로 동지처럼 허물 없이 지내며, 서로 칭찬을 아끼지 않고 영향을 주고 받는 모범적 시누이 올캐 사이라, 그 자양분이 부지불식 간에 아이들에게 스며 들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메아리에도 다 영혼이 있는 법인데 영혼 없이 어찌 가는 정 오는 정이 있겠는가!
자랑은 자만으로 들리니 거두기로 하고.......


며칠 결석도 해야 하고 보름이나 되는 귀중한 방학 시간을 몽땅 놀아 버린다는 것에 노파심이 부풀어 올랐으나 저희들끼리만 떠나는 여행이니 독립심에 융통성이라는 부수적 수확을 기대해도 좋겠구나 하며 혼자 마음 정리를 해 두었다. 우리가 도모해 보지 못한 일을 해내고 있다는 상상만으로 대리 만족하며, 온 몸으로 색다른 공기를 느끼고 돌아 오기를 바라고 있다.

누군가가 대리 만족이 영혼을 잠식한다고 말했다. 항차 부모라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기본 책무에는 최선을 다하지 않고 다만 자신이 못 이룬 꿈을 자식에게 투사하여 이루게 하려다 낭패하는 일이 허다하니 모름지기 이같은 대리만족이란 잠시 달콤하게 입술을 적시는 설탕물과 같다고 조금 비판적인 견해를 말한 것이다.  


우리가 못 다 이룬 꿈을 자식들에게 강하게 투사해 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 견해에 부분적으로만 동의하기로 한다. 아이들의 잠재력이나 다채로운 에너지를 잘 그러 모아 길을 환히 터 주지 못했다는 것에다 좀 더 열정적으로 선도하지 못했다는 점은 어쩔 수 없이 나를 침울하게 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손주들의 말릴 수 없는 호기심에 경탄하면서도 내심 궁리가 많아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새를 사랑한다는 것은 새의 날개를 꺾어 곁에 두는 것이 아니라 편히 쉬어 갈 보금자리를 만들어 다시 날아 갈 힘을 길러 주는 일인 것을, 어리석게도 보금자리 보살피는 일에만 골몰했지 않았나 하는 미진한 마음도 다 철 지난 자각인 것으로, 내게 남은 일이란 나름으로 아이들 잘 건사하는 자식들을 바라 보며 그저 그 아이들 안에 사는 한 그루 나무가 되었으면 하고 소망해 볼 뿐이다. 기대어 아픈 다리를 쉬어 가고, 그늘도 내어 주고, 산들 바람 불러다 시원하게 해주고, 추울 때면 바람벽도 되어 주고, 그렇게 말 없이 그 자리에 사는 나무가 될 수만 있다면....

2월 (February)은 마음을 정화시켜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자는 의미를 가진 달이라고 한다. 막바지 한파가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번 주에도 기온을 영하로 떨어뜨리며 막바지 힘을 쏟나보다. 그래도 햇빛은 투명하다.

봄은 언 땅을 밀고 오고 있을 것이다. 


시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을 시로 썼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 때문에 산다. 

자주 감자가 첫 꽃잎을 열고 처음으로 배추 흰 나비의 날갯소리를 들을 때처럼,  

어두운 뿌리에 눈물같은 첫 감자 알이 맺힐 때처럼............"


우리 영혼을 정화해 주던, 눈물처럼 영롱하던 아이들 성장의 날들을 잊지는 말아야지. 

시인의 목록에 비할 바 없이 그렇게 많은 목록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