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21년

<아름다운 날들> - 성 석제

수행화 2021. 4. 18. 23:51

"위대한 노래는 이승에도 천국이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 천국은 대체로 어린 시절에 속해 있고 추억이라는 이름의 왕이 다스린다."  < p. 270 >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에서 '달콤하고 즐겁던 그 아름다운 날들은 어디로 갔는가'라고 노래하는 '백작 부인의 아리아', 를 불러오면서 '아름다운 날들'의 이야기는 시작이 된다. 

시골 마을의 부잣집 손자, 장 원두는 초등 학교 신입생으로 일견 공부 잘하고 모범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다른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가득한 아이이다. 바보 친구 진용이는 지극한 가난에 무능한 아버지를 둔 불우한 환경으로 늘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는다. 손자 원두가 가장 존경하는 할아버지는 위엄으로 가정을 통솔하시면서도 원두에게 지극한 내리사랑을 보이시니, 힘든 노동에다 술 주정뱅이 아버지의 술 심부름까지 해야 하는 진용이네 폭압적 분위기와는 극단의 대척점에 있다. 이웃으로 이사 온 가수 지망생 기타 리는 비굴하고도 비열하게 원두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원두가 할아버지 곳간에 손을 대게 했고 원두는 도시의 학교로 보내진다.

불법으로 부를 축적하고, 이권은 선점하는 등 교활한 인간군이 등장하며 이야기는 범위를 키운다. 심지어 마을에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처음 터를 잡을 때의 풍경이 실로 사실적이고 적나라하나 어쩐지 코믹하여 웃게한다. 전혀 우습지 않을 장면에 웃음이 나오니 나의 유머 코드가 남다른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도 된다. 그런 
여러 정경들이 어우러진 스토리텔링은 한 편의 영상보다 더 사실적이다. 그런데 그게 먼 과거가 아닌 60~70년도 배경이라니! 

그 시절의 가난은 옆집, 건넌 집 없이 보편적 사정이라 특별히 비관하거나 그로 하여 심상이 피폐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때 그 시절 가난하고 선량한 이웃의 표상이 진용이로 그려졌지 않나 싶다. 불우한데 우직하기까지 한 그가 짠해서 눈물이 그렁거리는데 느닷없이 웃음이 터져 나와 갈피를 잡지 못해 하면서도 연신 페이지는 넘기게 된다. 모처럼 허리가 휘게 웃으면서 나이 들면 의식적으로 코미디 프로를 시청하라고 하던 충고가 떠 올랐다. 어쨌거니 너무 웃다 보니 가슴에 갇힌 공기가 일시에 빠져나가는 느낌이 여실해 뱃속에 커다란 구멍이, 아니 광장이 생긴 것만 같았다. 

더부러 한 시대를 살아내던 소년들에게 인생의 길은 달리 열려 있었고, 그들은 그들 몫의 책임을 다하며 성장하였을 터,  바보라지만 자기 앞의 생에 충실한 진용이의 성실함이 이야기 전체에서 유난히 마음에 새겨진다. 들춰보지 않아도 지난한 인생의 파노라마를 보는 것 같아 애잔하다.

"워낙 복을 타고났으니 , 나쁜 일이 있으면 '만복 중에 어쩌다 버릇없는 복 하나가 집을 나간 모양이군' 그랬거든요"
< p.10 >
"천하에 갈 데 없는 불한당이라고 인정할 만한 짓을 꾸준히 쉬지 않고 해내기란 올바른 일을 그렇게 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 p.11 >
다리 건넌다고 느매동, 맞은편 동네를 다리 건넌다고 건내동"
"입에는 먹지도 팔지도 못하는 담배 도너츠가 스무 개쯤 만들어지는 무렵" 
"고민과 고민의 새끼가 손자와 증손자를 데리고 결국은 기타 리를 찾아갔습니다. "  < P. 62>
"동네 사람들은 저마다 복음인지 한 덩어리씩 챙기고는 일부를 먹기 시작하는 거시 아닙니까"

마을 이름도 재치 만발에 정겹고, 기타 리가 담배 피우는 장면 하며, 비굴하고 좀스럽게 원두에게 접근하는 모양새는 불량하고도 위태로워 애가 타야 맞는데 웃음이 먼저 터지니 무슨 조화인지? 말을 꾸어오고 부리는 기술에 따라 글이 얼마나 정교해지며, 독자의 마음에 오래 잔상으로 남을 수 있나 보여주는 글 같다. 똑같은 우스개 말도 유난히 우습게 전달하는 사람을 우리는 가끔 본다. 성 석제 작가도 진지한 주제를 정색하고 전하지만 듣는 우리에게 유머로 접수되어 기억 창고에 잘 쌓이니 가히 언어의 연금술사가 아닌가 싶다. 잊혀져 가는 고금의 우리말이나 짙은 색깔의 향토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제련해 쓸 수 있는 진정 보배로운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유년 시절은 그리움의 딴 이름이다. 유년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은 전 생애를 통해 우리를 위로하고 고무시킨다고 나는 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기억을 더듬어 보네, 추억에 잠기네 하는 한가로움을 어딘가로 밀어내 버린것같다. 시간을 반듯반듯 자로 재어가며 내 몸에 맞게 잘라 써야한다는 강박 비숫한 관념들에 은연중 지배를 받고 살아서인지 모르겠다. 작가의 개인적 경험과 영감들이 독창적인 문체를 장착하고 홀연히 나타나 평소 자주 쓰지 않던 우리의 웃음 근육을 흔들어 깨워 주는, 정이 가는 책이다 싶다. 봄이 익어가는 창가에서 작가의 붓끝 이끄는대로 쫓아가다 보면 정겨운 마을 풍경도 보이고, 웃음까지 가득해 더부러 미소 띈 내 마음은 책의 포로가 되고 만다. 문장의 힘이지 싶다.

이 책은 마력을 지녔는지, 자장을 일으켰는지 나는 성 석제 작가의 책을 내리 네댓 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