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21년

"예술 속의 삶 삶 속의 예술" - 정 연복.

수행화 2021. 4. 30. 09:41

 

 

지난달에 '정 연복의 그림 이야기'라 부제가 달린 책, "예술 속의 삶 삶 속의 예술"을 저자로부터 받았다. 종이 날에 손가락이 베일 것 같은 새 책을 받아 들 때면 내 손은 언제나 공손해진다. 새 책이 주는 파릇하고 도도한 긴장감도 있지만 저자의 땀과 공력이 오롯이 전해져 와 존경의 념이 들기 때문이다.

"상상의 박물관에서 행복한 산책 하시길", 정 연복 드림,
책이 표지부터 우선 아주 사랑스럽다. 뽀얀 우윳빛 배경이 좋고 시선이 아름다운 여인의 초상이 사뿐히 자리한 모양새가 요즘 말로 엣지있다고 해야겠다. 표지 다음 장은 우아한 황갈색 빈 페이지 두 겹으로 여유롭고 멋스럽다. 또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처음처럼 다시 표지의 그 여인을 만나게 된다.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미처 가시지도 않았는데 차분한 시선에 거듭 눈이 가니 자태부터 찬찬히 한 번 더 굽어보게 된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아름답다. 너도 그렇다"
자세히 보니 여인이 더욱 아릿다워 시인의 말이 저절로 떠 오른다. 얼마 전에 일본인 의사가 쓴 , "나는 이제 마음 편히 살기로 했다"는 책도 같은 방식의 편집이었는데 멋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왜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미술관 입장 전에는 호흡을 정돈하고, 바쁜 마음도 조금 내려두듯이, 내 나름으로 감상 준비를 쉬엄쉬엄 하고 저자의 서문을 시작으로 여정을 따라 나선다. 

"여기 묶인 글은 박물관과 전시회를 다니며 펼친 내 자유와 상상력의 흔적이다. 나의 여정이 독자들에게 아리아드네의 실이 될 수 있기를. 서둘러 미로를 빠져나가고 싶어 하기보다는 천천히 음미하며 미로가 주는 긴장감과 다가올 햇살에 대한 희망으로 행복하기를..."

그림 이야기는 5part,
part 1. 빛과 색깔로 그리는 이상향. 10편
part 2. 사랑이라는 신화. 10편
part 3. 내 이름은 마들렌. 10편.
part 4. 죽음에 대한 응시. 10편. 
part 5. 텅 빔을 채우다. 위반과 역설의 이야기 10편으로 로 엮여있다.

작품에는 작품 소개와 아울러 화가의 생몰 연도, 작품의 크기,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 등의 정보가 있고 전문적 해설과 체험담이 어우러진 감상평이 편안하다. 명화에 빠질 수 없는 신화 속 배경이나 고전은  딱딱하지 않은 정도로 간명하게 해설하고, 작품과 연관된 영화를 곁들여 소개하는 등 등으로 작품의 이해를 도우고 감상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었다. 꿈에 그리는 아름다운 미술관을 상상하며 작가의 시선을 따라 그림 이야기를 듣다 보면 책 읽기는 호사스러운 시간 보내기가 된다. 그렇게 읽으려 노력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평소 자주 접하지 않는 분야의 책이 내 정신의 밭을 갈아주는 쟁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땅심을 돋우기 위해 윤작을 시도하는 농부의 마음으로 새겨가며 읽었다. 


"예술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놀라게 하고''감동시키고' '다르게', 또 '새롭게' 보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 P. 38 >

시인이 시로서 그리움을 일깨워 주는 건 알지만 박물관 산책이 아름다움을 기억해 내고 또 다른 먼 그리움을 불러오는 기능이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화가에게 특별했던 순간을 후세의 우리가 함께 바라보고, 화가의 감각을 느끼며 감동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멋지고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게 한 시대의 사랑과 기억들을 걸어 두고 우리의 호기심을 꺼내 보게 하는 특별한 일을 미술관은 오늘도 하고 있는 것이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런던에 안개가 없었고, 그림이 런던 안개의 지위를 높였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고 기억에 남아 있다. (영혼의 미술관에서). 그림이 끄집어내는 바람에 비로소 하늘을 바라보고, 그림을 통하여 신성(神性)을 느끼는 계기가 되는 등 그림은 알게 모르게 우리 일상에 침투해서 우리로 하여금 의문과 호기심을 일으키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패키지 해외여행을 가면 일정에 박물관 견학이 자주 끼워진다. 물론 주마간산으로 휘이이 한 바퀴 돌고 눈도장 찍고 돌아서 시간에 쫓겨가며 나오는 게 고작이다. 그런 내게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PRADO) 미술관 관람의 기억은 예외적이다. 비록 잰걸음으로 가이드의 판에 박힌 작품 해설을 듣는 방식이라 해도 값진 기억으로 남아있다. '옷을 입은 마야'를 비롯한 세계적인 명화 몇 점을 코 밑에서 보는 것도 설렜고, 벨라스케스 '시녀들'의 해설은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즐거워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에 씁쓸한 압박을 느꼈어도 그저 그 공간이 주는 충만감을 좋아라 했다. 여유롭게 시간을 쓰는 것 같은 여러 관람자들을 몹시 부러워하며 떠나왔지만 바쁜 일정 중의 작은 보람이요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림 감상이 책 읽기와 유사한 점은 이렇듯 이런저런 기억과 잡념들이 분별없이 튀어나와 집중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그림에 대한 나의 일천한 경험과 얻어 가진 지식들이 잊혀진 세월에 대한 반란이라도 꾀하자는 것인지, 갑자기 산만하게 떠오르면서 본질을 흐려놓아 조금 심란해졌다. 예술을 삶 속에서 구현한다는 일이 강퍅한 우리 살이에 어디 녹녹한 분야였던가? 

이 책 46P에 실린 그림, 고흐의 '랑글루아 다리'의 해설이 반가웠다. 내 청춘의 시간에 영혼의 사치를 위한 하나의 상징처럼 뇌리에 박힌 마을 이름은 아를르, 작품 '아를르의 다리'의 작품성이나 가치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데도 왠지 그림, 아를르라는 지명이 준 서정적 느낌은 아직도 서늘하다. 그림이나 음악에서 아를르라는 마을이 보여주는 소박함과 평화가 내 마음을 다독이며 위로를 보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흐의 다른 그림도 마찬가지로, 그의 손끝에서 피어난 감동의 터치는 파도처럼 일렁이며 내게 다가옴에 영혼이 마구 흔들렸던 벅찬 순간들이 이 책을 읽으며 또한 되살아났다. 

그리고 르누아르가 포착했던 행복의 순간들에 더불어 느껴지는 행복을 나는 좋아한다. 화가의 시간은 분명 그 순간에 정지되어 보존된 것인데 시간을 건너뛰어 우리의 감정선을 흔들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일으킨다는 것만으로도 예술은 인류에 공헌하고 있지 않나 싶다. 고만고만한 일상을 살면서 호기심을 흘려 잃어버려도 하나 불편을 모르니 아름다운 풍경 속을 눈 감고 걷는 형국이지 않았나 반성에 들어간다. 모름을 인식하고 호기심을 비타민 챙겨 먹듯 챙겨 볼 일이다. 지금은 1m의 다비스 상이 코엑스 앞에 우뚝 서는 문화적 환경에 우리가 살고 있다. 예술을 가까이할 여력이 없다는 건 핑계뿐일 테니 말이다. 

르누아르의 '바느질하는 미리 테레즈 뒤랑 뤼엘' 의 그림엽서를 책상 서랍에서 꺼내 본다. 십 수년 전 - 사진을 찾아보니 2009년 - 손녀들과 르누아르 전시회 관람했을 때 마그넷이랑 샀었는데, 언젠가 액자에 넣어 소녀를 비추는 햇살이랑 행복한 표정이랑 바라보며 행복을 전해 받으리 했는데 아직까지 비닐 옷 입은 채 서랍에 잠재운 것이 책 읽던 중 기억이 나 꺼내 보니 아직도 그지 없이 사랑스럽다. 책이 기억 여럿을 불러 모은다. 액자에 끼워야겠다.

 



우리는 흔히 형언할 수 없이 멋있어 보이는 것을 볼 때나, 상상 안 되는 근사한 상황을 만날 때 속된 표현으로 "예술이다"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정 연복 작가의 책을 펼치며 '도입부부터 예술이네, 라는 말을 내가 하고 있었다. 저자의 발길 따라, 아리아드네의 실이 인도하는 미로를 걷는 공상과 더부러 앉아서 한바탕 문화 기행을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