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09년

영원한 문학 소녀, 장 영희 교수를 기리며

수행화 2012. 12. 3. 22:17

비 내리는 아름다운 5월 아침. 영원한 문학소녀 장영희 교수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기다리면서 나중에 만나”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사흘에 걸쳐 힘들게 엄마에게 편지를 남기고.

나는 마치 아끼는 여동생을 잃은 듯 슬프고 아까운 마음에 가슴에 싸한 통증이 왔다.
나와 어떤 인연을 가진 것도 아니고 평범한 한 애독자일 뿐인데 말이다.

장애를 넘어 학문에 매진하고 꿈을 이룬 그녀를 늘 존경하던 가운데
몇 년 전 신문에 연재 되던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을 읽으며 나는 점점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사이 우리네 시는 이상한 이념의 영향인지 시대의 흐름인지 모르겠지만 시어가 혈투에 가깝게 험악하고 표독스러워 섬찟하고 싫었는데...

그녀의 아름답고 영롱한 번역시는 너무 신선했고
그래서 나는  내 홈페이지에 오려 놓기도 했고 우리 정서에 맞는 시는 프린트해서 친구에게 나눠 읽으며 공감을 요구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니었던 모양.
잠깐 연재하려 했던 것을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에 1년 간을 연재하게 되었단다.
꼼꼼히 읽을 요량으로 나는 단행본으로 엮어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책(그녀의 표현)을
사서는 머리맡에 간직해 두고 있다.

그녀가 병으로 절필을 선언할 때도 한 없이 가슴 아팠고,
또 투병 후에 홀연히 나타났을 때도 반갑고 기뻤으며 그의 글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었다.
이글을 쓰노라 혹시 과로하지는 않나 또 발병하면 어쩌나....
그래서 글들을 더 소증하게 읽었다는 건 나만의 감상이었을까?  
그렇게 그녀는 치열하게 투병했고 시간을 농축해서 촘촘히 살았다고 본다.

그런 그녀가 이슬처럼 사라졌다니...이슬처럼 영롱하게.
운명은 뜨거운 햇살이 되어 집요하게 생명을 말려서 마침내 우주에 날려 버렸단 말인가!

아까운 딸, 장애와 병마와 학문과 동반했던 생.
신이 있다면 너무 가혹한 시련을 준 거라고 우리는 여기는데
정작 자신은 천형이란 말을 아주 싫어 했고 장애로 동정하는 일반인에 크게 자존심이 상했다고도 했다.
장애가 없다고 장영희씨 보다 더 인생을 잘 살았을까 당연히 반문해 보게 한다.

그는 늘 희망과 용기를 얘기 했고 세상을 아름다운 시선으로 말해 줬다.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는 말.
완치 된 줄 알았던 병마가 재발 했을 때 그가 세상에 던진 말이다.
그 말은 심신이 아픈 많은 힘든 영혼에 ‘장영희 효과’라는 신드롬을 만들면서 희망의 바이러스를  퍼뜨리기에 충분했다.
목발에 의지하며 느리게 걸으며 빨리 달리는 남을 부러워하기보다 오히려 남보다 느리게 걷다보니 세상을 더 많이 천천히 볼 수 있다며 긍정적 가치를 말하던 예지에 빛나는 고고한 마음을 나는 늘 존경했다

또 대학교 때 본 책에서 ‘나쁜 운명을 깨울까봐 살금살금 걷는다는 어느 극중 인물 묘사를 보고
“나쁜 운명을 깨울까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는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살 것이다” 라며 
운명에, 인생에 당당히 도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더니.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위해 그녀의 문학을 위해 글을 쓰지 않아도 되는 평온에 들었는데
남은 자는 아쉬움과 애석함으로 마음에 슬픈 비가 내린다.
그녀의 운명을 예견하기라도 했던지 ‘축복’이라는 책머리를
“축복같은 꽃비가, 아니 꽃비같은 축복이 내리는 이아침에”라는 말로 마무리 했다.

아름답고 여리나 생명을 튀우며 대지를 잠에서 깨우는 강인한 봄비처럼, 우리의 가난한 영혼에 희망의 비를 뿌리며 그는 과거의 여인이 되어버렸다.
아깝다. 그리고 아름다운 그녀의 영면을 빈다.

< 2002. 5. 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