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없고 먹먹하게 5월을 흘려보내던 나에게 손녀들이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관람이라는 호사를 안겨 주었다. 가벼운 흥분에다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집을 나서니 몹시 인색하던 내 안의 미소가 화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비타민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나에게 이런 날은 며칠치의 활성비타민이지...' 산소라도 들이킨 듯 새틋해진 마음으로 아이들을 만났다.
공연장인 블루스퀘어를 내비에 입력하고 출발하려니 우리 세영이는 어서 앞자리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내비를 저가 봐주어 할머니 수고 덜어주겠다는 빠른 판단이 얼마나 귀엽던지! 내 우충충하던 마음의 배경이 싹 바뀌는 걸 느끼면서 달렸다. 물론 세영이에 힘 입어 가쁜하게 도착을 했었다.
공연 시간이 임박한 것도 아닌데 로비에는 이미 관람객으로 어느정도 붐비고 있었다. 목하 코로나로 조심스러운 상황이니 공연장은 상당히 여유로우리라 상상했는데 어림없었다. 뮤지컬 작품 중 티켓 예약률이 가장 높은 작품이라더니 바로 그런 현장인가 여기며 공연장 주변을 한바퀴 돌아 보았다. 로비에는 책이 단정하게 진열된 서가가 높게 공간을 가르고 있어 멋져 보였는데 여기가 인터파크홀이라 연관 있는 컨셉인가 하고 좋게 보았다. 공연한 관심이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스르륵 올라가고, 서곡이 흘러나오고, 막이 오르니, 무대 바라보랴, 자막 보랴, 음악 들으랴 갑자기 감각이 총동원 되면서 마음이 바빠졌다. 귀에 익은 음악은 스쳐 흘러가고, 더듬더듬 자막을 읽는 어수선한 사이에 무대에서 는 벌써 경매가 진행되고 있어, 어영부영하는 사이 이도저도 놓칠 것같아 곧 자막 읽기를 접어버리고, 음향과 무대에 집중하기로 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다들 아는 스토리이고, 오래전이지만 영화도 보았던 터이라 오늘은 화려한 무대 장치와 뮤지컬 배우의 생생한 목소리에 집중하기로 하니 여유가 조금 생기는 듯했다. 관람 요령을 미리 좀 궁리해 둘 것을 하는 마음이 일었다.
무대는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 서곡이 '빠~빠바바바밤~'하며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음향이 찌르는 듯이 울려 퍼지는 것에서 감동을 미리 예약하긴 했었다. 이어 크리스틴의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노래, 유령의 간절하고 음울한 노래, 사랑스러운 이중창 등을 들을 때는 실로 전율이 일었다. 폭발적인 가창력은 배우들이 마이크를 어디다 매달았는지 궁금증을 자아내기까지 했으니...... 19세기라는 저 아득한 시절에 귀족들이 누렸을 화려한 공연 문화를 상상하니 더 과장되게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재미있는 것은 액자 속의 액자처럼, 무대 속에서 오페라 공연에, 발레 군무에, 가장무도회 장면까지 본다는 것이었다. 음악에 얹어 볼거리도 한 가득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오페라 하우스 지하에 살고 있는 유령은 크린스틴에게 연심을 품고 있다. 그게 일방적이고 광적인 것이라 비극의 단초가 된다. 음악을 통해 사랑의 최면을 걸고, 크리스틴을 위해 음악을 만들고, 자기 음악의 완성을 위해 더욱 크리스틴에게 집착한다. 크리스틴은 마법에 걸린듯 유령을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낸 천사라 상상하면서 가수로서 기량을 높여간다. 신들린 듯 아름다운 고음을 내어가는 크리스틴을 유령은 프리마돈나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크리스틴은 귀족 라울을 만나면서 둘만의 사랑을 노래하고, 유령은 질투심과 배신감으로 이들을 괴롭히고 오페라 공연을 방해한다. 어둠 안에서 사랑을 키우고, 사랑을 지배하고 독차지하려던 유령의 광기는 파멸로 치닫고, 급기야 크리스틴을 지하의 자기 공간으로 끌고가면서 긴장감을 부르게 된다. 그런데 배를 타고 크리스틴을 강제로 데리고 가는 장면이 무섭기보다 조금 서정적으로 보인 것은 왜 일까? 음악, 안개, 촛불? 납치된 크리스틴은 유령의 존재를 확실히 알았고, 그의 병적인 집착에 두려움을 느끼는 한편 어둠을 택하게 된 유령을 향해 연민심을 가지게 된다. 유령의 고뇌를 이해하는 진정어린 키스에 집요하던 유령의 마음은 흔들리고 크리스틴을 놓아준다.
어둠 속에서 잘못 키워진 광적인 사랑에 유령의 천재성이 더해져 음악은 은밀하고 아름다워졌고, 크리스틴도 천상의 소리를 내게 했지만 결국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는 법으로 크리스틴은 밝음의 인간, 라울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유령은 분노를 걷잡지 못해 오페라 극장을 망치고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가며 비극으로 끝이난다. 훗날 유령이 아끼던 원숭이 차임벨과 오페라 극장의 부서진 샹들리에가 경매에서 거래가 되면서, 지난 날 오페라 극장에 얽힌 사랑 얘기를 재생해 보여주는 형식이어서, 오페라 무대의 샹드리에는 그냥 장식이 아닌 것이다.
작품 오페라의 유령은 몰라도 음악은 많은 이에게 사랑받아 왔지 싶다. 아름답고 애절한 분위기에 들을 때마다 늘 감동을 받는다. 우리에게 거의 클래식이 된 듯 익숙한 음악, 'The Music of The night',
"........ and listen to the music of the night....... Help me make the music of the night"
자신의 음악을 이해해 달라며 크리스틴을 설득하는 노래이련만 감동을 받는 것은 우리,
".......the power of the music of the night" 마지막 부분이 귓전을 떠나지 않아 한 동안 함께 지낼 것같다.
'The phantom of opera' ,
'Think of me' 'All I ask of you'
크리스틴이 유령을 순수하게 천사로 받아들이며 부르던 노래, 귀족 청년 라울과 크리스틴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부르는 이중창, 유령이 사랑을 갈구하는 노래 등은 중독성이 있어 쉬이 잊힐 수 없고, 영원히 사랑받을 음악이 될 것이라 믿는다. 내 소박한 식견으로서도.
무대를 빛과 색채로 꽉 채우고 있는 의상들, 갖은 분장들, 지하세계와 어둠을 표현하는 안개와 촛불들......
한번 스쳐 보기엔 아까운 장면들을 기억 속에 조금 오래 붙잡아 두려 노력했으나 벌써 아슴아슴하다.
추리소설은 결말을 미리 알아버리면 김이 빠지고 박진감이 없다지만 뮤지컬은 음악을 더 많이 알고 이해한 다음에 임해야 극의 전개와 배우들의 연기가 눈에 들어와 편안한 관람이 될 것이라 본다. 바쁘게 휘리릭 봤다가 다시 보기를 할 수 있는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애호가들은 이미 그런 경지이겠으나, 문화적으로 일천한 나에게는 스쳐가는 순간들이 아쉬워 뒤늦게 해 본 생각이다. 벌써 두 번째 관람인 우리 규영이는 누구의 노래가 최고의 감동이고, 누구는 노래를 아주 망쳐버렸다며 오페라의 유령에 관한 조예를 조잘조잘 잘도 드러낸다. 'Music of The night' 음악에 남다른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은 프랑스의 추리작가 가스통 르루(Gaston Leroux)가 1910년에 발표한 소설이 원작이라고 하는데, 원작보다 뮤지컬 작품으로 더 알려졌지 싶다. 브로드웨이에서 30년 이상 공연됐다는 것도 놀랍고, 이번 내한 공연도 7년 만인데, 2001년 이후 누적 100만 관객을 돌파하였다고 하여 또 놀라기도 한다.
막이 내리고 나는 손녀들과 맛있는 것도 사 먹고, 한가한 시간을 보냈으면 했는데, 집에 들어가 쉬고 싶은 눈치라 뒤풀이 없는 밋밋한 관람이 되어버려 아쉬웠다. 기념품 숍 기웃거리다 아이들 뱃지 하나씩 사주고, 나는 마그넷 하나를 고른 것으로 서운한 마음을 달래봤다. 곧 공부하러 떠날 아이, 이제 공부에 박차를 가해야 할 아이들인지라 나에게는 이런 짧은 만남이 그렇게 소중한 데도 말이다. 그 많은 시간들을 나는 다 어디다 써 버렸단 말인가?
문화 예술적 바탕이 남다른 우리 손녀들이 어여쁘고 교양 있는 멋진 숙녀로 성장해 가는 어느 봄날을 나와 함께 했다는 점에 크게 의미를 두어보며 홀로 벅찬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