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두고 누군가와 담소 나누는 일이 언제였었나 싶게 서서이 드문 일이 되어졌다. 눈도 아프고 귀찮은 거 싫어진 시절에 든 친구들에게 종이책 얘기는 꺼내는 것마저 눈치 없는 짓 쯤으로 됐다. 그런데 우리 손녀들은 책 읽기를 좋아하고 재밌다면서 가끔 나에게 도서 추천도 해주어 너무 기특하고 사랑스럽다. 얼마 전에도 둘째 세영이가 책 한 권을 내밀며 읽어보니 아주 좋았었다고 두고 갔다. 책을 펼치기도 전에 아이가 할머니와 공감하고자 하는 마음 씀씀이에다 미리 '좋아요'를 눌렀고, 읽으면서 깊어진 아이의 속마음이 보여서 놀랐고 감동이었다. 아기라 자라 이 어른을 가르친다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당신이 옳다'라는 책, 그래서 글 잘 쓰는 정신과 의사로 기억하는 정 혜신의 글을 오랜만에 읽게 됐다.
내용은 어려운 정신과적 이론서가 아니고 또 진료실에서 행해진 치료 사례도 아니어서 고개 끄덕여 가며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고통에 빠진 사람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한 경험들, 상담 사례들을 호소력을 가지고 들려준다.
"사람을 정신의학적 관점, 질병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모든 게 단순 명료해진다. 거의 모든 걸 생물학적 원인이라고 설명하니 간단하기도 하다. 그에 맞는 약을 건네면 됐다. 그 순간엔 나만 알고 있는 내면의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의학적 설명에는 환자 누구도 토를 달지 않으니까. 오히려 그럴수록 더 전문가로 대우하고 그 의견을 무조건적으로 접수해 주니까. 그래서 의사라는 느낌은 내게 늘 안전한 경험을 선사했다. 견제당할 수 없는 자격증의 성체 안에서 나를 찾아온 사람에게 나는 확고한 주도권을 쥔 전문가였다." < P.19 >
정보의 홍수에 빠져 사는 우리는 특히 질병 진단이나 치료에 관해 주워들은 상식이 어지간하게 됐다. 그런데 가끔씩 정신과적 진단이나 치료 사례를 듣다 보면 납득 안 되는 부분이 있어 왔다. 예를 들면 마음이 힘이 든다는 환자에게 신체적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많은 검사를 해야한다는 것 등이다. 마음 아픈 것이 X선 상에 나타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하는 따위의 의문을 갖게 되더라는 것이다. 저자의 글 중에 정신과에서 행하는 검사와 약물 처방은 치료 방식면에서 최우선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어 나의 의문이 아주 그르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해 줬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이 어째서 우울증인가, 말기암 선고를 받은 사람의 불안과 공포가 왜 우울증인가, 은퇴 후의 무력감과 짜증, 피해 의식 등이 어떻게 우울증인가, 학교에서 왕따 당한 아이의 우울과 불안을 뇌신경 전달 물질의 불균형이 초래한 우울증 탓으로 돌리는 전문가들은 비정하고 무책임하다." < P.90 >
"현대 정신의학은 드러난 증상만을 가지고 진단을 확정한다. 어떤 요소도 진단에 영향을 끼칠 수 없도록 진단 체계를 만들었다. 표면적 증상만 같으면 같은 질병이다.... 거의 체크 리스트 의학이 되다시피 한 현대 정신의학의 모순이고 비극이다. 한동안은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며 누구나 가볍게 치료하면 되는 병이라고 하더니 요즘은 우울증을 '마음의 암'이라고도 한다." < P. 98 >
저자의 치료의지는 좀 남다르다. 정신적 고통에 처한 환자에게는 마음을 움직여 나가는 것이 어떤 약물 치료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의 고통을 질병 취급해서는 치료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이다. 환자의 상황에 심리적으로 공감하고 지지해 주면서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큰 힘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그런 치료 방식의 중심에 공감이 있고, '정확한 공감'은 치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며, 이를 적정 심리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자격증 있는 사람이 치유자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치유자'라는 저자의 견해가 이 책의 중심 사상이라고 보았다.
요즈음은 우울증, 공황장애 등의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을 제법 많이 보게된다. 병은 문명의 발달에 발 맞추어 세포분열을 하고 진화하기라도 하는지 백약이 무색하게 병명이 늘어만 간다. 늙고 병드는 인간의 근원적인 괴로움 외에도, 우리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인간 관계에서의 소외감, 학업 성취나 직업 적응 등 등 현실적인 어려움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보았다. 우울이라는 것은 삶의 보편적인 바탕색이라는 저자의 말에서 보듯이, 인간은 존재 자체가 고독한 것이거늘 어찌 이 모든 고통을 병이라할까 싶은 게 나의 생각이다. 이러한 혼돈과 괴로움이 자신의 힘만으로 극복되지 않을 때는 전문가의 도움과 손길이 필요할 것이다.
치료의 첫걸음은 "언제나 나는 너의 편"이라는 정서적 믿음을 바탕으로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것이고, 공감해 주기 위해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당신이 옳다"라고 말해 주는 것이다. 단순명료한 말인데 함의가 무척 크다고 해야겠다. 많은 말이 무순 소용인가? 믿고 지지한다는 마음의 전달이 많은 일을 해낼 것이라는 전제가 십분 이해가 간다.
"네가 그럴 때는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말은 '너는 항상 옳다'는 말의 본뜻이다. 그것은 확실한 '내 편 인증'이다. 이것이 심리적 생명줄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산소 공급이다. < P. 49 >
“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애기할 때는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대화가 시작된다. 충조평판은 고통에 빠진 사람의 상황에서 고통은 소거하고 상황만 인식할 때 나오는 말이다...... 모르고 하는 말이 도움이 될 리 없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안다고 확신하며 기어이 던지는 말은 비수일 뿐이다. < P. 106 >
“ 공감자는 모든 사람과 원만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니다. 너도 마음이 있지만 나도 마음이 있다는 점, 너와 나는 동시에 존중받고 공감받아야 마땅한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관계를 끊을 수 있는 힘도 공감적 관계의 주요한 한 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관계를 끊는 것이 너와 나를 동시에 보호하는 불가피한 선택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 P. 170 >
환자의 마음을 이해한다하면서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든다면 고통 받는 이의 상처를 헤집고 덧나게 해서 재삼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점을 새겨야 할 것같다. 아무리 훌륭한 말이라도 계몽하듯하면 제대로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건 상식이다. 진정성을 갖고 신뢰를 쌓아가며 마음의 의지처가 되어 주는 것이 몇 첩의 약 복용보다 효과적이라지 않는가! 계절이 오가고 날씨가 변화무쌍한 것처럼 우리의 삶도, 감정도 변화가 본질임을 깨닫는다면 매사에 일희일비하며 마음을 흔들지는 않을 것이다. 공감해 주고 한 편이 되어준다는 일이 어디 말처럼 쉬울 일인가! 먼저 나를 챙기고 내 마음에 공간을 확보해야 타인을 응원하고 다독여 줄 여력이 키워질 것이므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며 치유를 도우는 과정은 결국 나 자신의 치유이기도 할 것이다. 내 인생에 대해 성찰하고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더 키울 수 있겠다 싶다.
# 아무리 거센 파도도 멀리서 바라보면 한낱 풍경일 뿐, 마찬가지로 숨통을 조이는 고통도 타인에게는 그저 안타까운 정경일 뿐일 것이다. 고통의 바다에 함부로 내던져져 저 어두운 바닥까지 떨어져 본 사람들은 안다. 바닥을 박차고 솟아올라야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타인의 도움은 말 그대로 조력일 뿐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고 본다. 괴로움을 헤쳐 고통의 실체를 똑바로 바라보고, 인정하고, 마음을 정돈하는 노력도 내가 할 부분이고, 누군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 때에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공간도 내가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묘책이 어느 날 밖에서 불쑥 찾아와 도깨비방망이처럼 상황을 변하게 해 줄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면 어떤 고통도 절반의 치료를 넘었다고 나는 본다.
죽을 것만 같은 괴로움을 시간에 기대어 눅어지기를 기다리고 인내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혹한 일인 것을 안다. 그러나 모든 감정의 주관자는 나이기 때문에 그 몫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마음에 난 내상이 외상과 다른 점이 이것이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성장하고, 실패나 패배에서 배움을 얻게 된다는 것, 경험함으로써 마침내 알아간다는 것이 슬플 뿐이다. 괴로워한다는 말의 어원은 받아들인다는 뜻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주워 읽은 것 같다. 과거의 짐을 벗어 보겠다는 노력, 일상의 패턴에 변화를 주어가며 기분을 새롭게 가져 보려는 노력,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삶의 배경을 바꿔 보겠다는 구상.....고통도 개별적이요, 치유도 자기만의 방식이 있을지니 현실을 바탕으로 자기역량을 키워보는 것도 좋을 것같다. 천가지 만가지의 복잡한 내 마음을 의사에게 온전히 다 내맡길 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병원이라는 곳은 두려움이 사는 곳이고, 의사는 그 안에 살며 가끔 환자의 생사여탈권을 거머쥔 염라대왕처럼 굴기도 한다. 서러움은 늘 환자의 몫이다, 이러한 의사의 치료 자세가 옳지 않다는 생각을 정 혜신 의사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조금 위로가 된다. 갖은 검사로 뚜렷한 병명을 못 찾으면 과민성이라거나 화병이라 진단해 주더니, 급기야 이 '화병'이 어엿한 병명으로 몸값이 매겨지는 현실에서 이 책은 참신한 비판의 멧시지를 던지는 느낌이다.
환자를 지겨운 군상으로 봐 넘기려는 의사들을 나는 적지 않게 보아왔다. 그럴 때면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동네 주민의 대표 주치의쯤 되던 '문내과' 선생님이 떠오른다. 공감이 절반의 치료를 감당해 주는 더없이 좋은 예라고 해야겠다. 병원 출입을 무시로 하며 자라던 아들이 시간에 쪼달리는 고3이던 시절, 병원을 찾아 아이 사정을 얘기하니, 진료카드 위에 크게 고3이라고 써두질 않나, 딸이 대학생이던 시절 아파 병원엘 데려가니 전공이 무어냐고 묻더니 진료 카드에 또 커다랗게 영문과라고 써두질 않나, 내가 아파 기다시피 하며 진료실에 들어서니 급히 혈압을 재 본 후 이 혈압으로 어떻게 걸어왔느냐며 내 손을 붙잡고 주사실 간호사를 부르지를 않나...... 사소한 공감의 습관이 환자에게 크나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으니 그는 훌륭한 치유자의 본보기라 추억해도 될 것이다.
삶이 힘든 여러 모습들을 보면서 책이 소중한 것은 간접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당신이 옳다'는 이웃집 불구경하듯 읽어 나가지 말고, 주변을 섬세하게 돌아보고 배려심을 더 갖추라는 충고의 글 같기도 하고, 나의 고통에 연민심을 가지라 말해주는 것 같기도하다 여기며 책을 덮었다. 그리고 깊은 내공이 있는 저자의 글이 혹시 여리고 배려심 많은 우리 세영이 마음을 슬프게 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