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20년

'유현준'의「어디서 살 것인가」를 읽으니...

수행화 2020. 9. 6. 13:19

 

 

사실 나는 이 책의 존재를 잘 몰랐었다. 손녀 세영이가 읽어보라며 가져다 주기 전까지는.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니 아이와 책 얘기도 하고, 이런저런 한담도 나누게 되는 소중한 시간도 있다. 할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읽혀 고마울 뿐이다. 그런데 저자의 프로필을 살펴 보다보니 얼마 전에 신문 칼럼에 '도시 이야기'(?)를 기고한 홍익대 교수 분이라는 걸 알았다. 하버드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건축가로 여러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대중적 인기가 상당하다고 하는데 내가 tv를 꼼꼼히 시청하지 않아 얼른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도회적인 외양으로 일단 출중하게 멋있다. 그간의 대한민국은 속도전으로 집을 짓고, 길을 만들며 개발이라는 목표를 향해 치달았고, 사돈 따라 장에 가듯, 재빠르게 유행 따르고 시류에 영입하다보니 붕어빵같은 집이나 빌딩을 찍어내기 급급했었지 싶다. 이제 숨을 좀 고르면서 우리의 주거환경에 대해 좀 살펴볼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에 이 주제가 참 신선하게 와 닿았다. 


첫 장. '학교 건축은 교도소다'라는 지적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인데, 학교라는 건축물은 응당 그런 형태이려니 해버리고, 어떤 의심도 품어보지 않고 무심히 지내왔으니 당연한 놀라움이다. 저자는 문제점을 꺼내고 해법도 제시한다. 학교 건물을 저층화하고 몇 개의 동으로 나누어서 주택 형태의 교사 여러 채로 짓고, 마당도 다양하게 만든다든가, 옥상이나 계단을 활용한다든가 하는 창의적 아이디어를 내고 있다. 건물과 건물이 마당으로 이어 진다면 한쪽에서 운동을 하고 또 다른 쪽으로는 자연과도 접할 수 있어 학생들의 경험이 대채로울 수 있다는 취지이다. 건물의 층고는 낮추고, 천장을 높여 주면 학생들의 창의성이 향상된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지식은 책에서 구하지만 지혜는 자연에서 배운다는 점을 한번 상기 시켜준다.

얼마 전 저자의 신문 칼럼도 이 제안의 보충인 것 같았다. 전염병에 강한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도 학교의 규모를 더 잘게  쪼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수업을 온라인으로 하고, 선생님도 일방향 지식 전달 방식의 수업을 지양하게 되니 한꺼번에 아이들이 모일 필요가 없어 커다란 교실이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이다. 더 나아가 인공지능을 통해 학생 개개인의 성향과 수준에 맞는 맞춤형 수업을 제공한다면 열이면 열, 각자의 능력과 개성에 맞추어 개개인이 다른 커리큘럼으로 공부할 수 있으니 교육은 더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요지의 글인데 먼 미래의 일같이 들리지가 않았다. 

회사의 사옥도 '밥상머리 사옥' 구조가 바람직하다고 한다. 가족이 밥상머리에 마주 보고 앉듯이 회사 사옥도 중앙을 텅 비운 수직형 건물을 세워 건너편 공간을 마주 보는 형태가 바람직하다는 말이다. 시각적으로 트인 공간이 심리적인 소통을 이끌어내는 효과를 낸다는 이론이다.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이 이런 형태이고, 현재의 애플 사옥이 이런 형태인데 의미가 크다고 한다.  

수렵시대에서 농업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은 자연의 변화에 적응하며 살아남았고, 결과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꽉 막힌 실내 생활을 지속한다는 것은 '다양한 생각이 멸종하는 사회'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현대인이 SNS에 몰입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의 분출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도시는 가히 인류의 탁월한 발명품으로서, 인간이 삶을 역동적으로 영위할 기반이 된다는 이론에도 스긍이 간다.

바야흐로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고, 거주자의 요건도 대가족에서 소가족으로, 소가족에서 1인 가구로 변화해 가는 양상을 우리는 여실히 목격하고 있다. 1인 가구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도시인은 자기만의 사적인 공간을 가지고자 소망하고 있다. 잠시 나앉을 툇마루도 사라졌고, 제한된 공간을 더 넓게 쓰자고 아파트 베란다까지 없애는 추세였으니, 자기만의 사적인 공간에 대한 욕구가 더해진다고 말한다. 바른 지적이라 여긴다. 비싼 차를 사서 홀로 공간을 쓰는 것도 다 자기만의 공간을 원하는 일련의 행동들이라고 관찰한 것에도 동의하게 된다.

뉴요커는 좁은 집에 살아도 되는 것이 10Km 내에 10개의 공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접근이 용이한 공원은 좁은 집의 확장 효과를 낸다는 이론같다. 공원의 접근성이 어려운 도시, 잠시 앉아 쉴 벤치가 아쉬운 도시, 공간이 필요하면 접근성 좋은 대로변의 커피숍에서 비싼 커피를 마셔야 하는 도시.......짚어보는 서울의 문제점들을 따라가다 보니 바람직한 미래의 도시가 머릿속에 아웃라인을 그린다. 보행 친화적인 도시, 발길 좋은 곳에 작은 도서관을 많이 가진 도시 등등 제시하는 아이디어가 상상을 도와준다. 이 글들은 모름지기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할 수 있는 직(職)에 있는 사람들이 필독해야 할 일이라 여겨진다. 물론 도시를 사랑하고 높은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면 더욱 좋겠다 싶다. 

“현명한 자는 다리를 놓고, 어리석은 자는 벽을 쌓는다” 는 말과 '성을 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만드는 자는 흥할 것이다'는 말이 명언처럼 들린다. 건축에만 국한되어 적용되는 말씀 같지 않아 마음에 담아 본다. 나누어진 공간을 연결하고, 소통이 목적인 길과 다리와...... 소통하는 자의 삶은 발전하고 성장할 것이다.

 


건축가는 전문가적인 식견으로 말하지만 주부로서의 나도 내 나름으로 우리의 건축 문화에 아쉬움이 많아 왔다. 다만 잠깐의 불만일 뿐 타성에 젖어 살다가 어쩌다 공간이 바뀌는 여행지에 닿으면 불현듯 불만이 살아나곤 했다. 우리의 여행이라는 것이 단체로 움직이며 주마간산으로 흘러간다지만 그 틈새에서도 객관적인 느낌은 있는 것이다. 
여행 경험이 짧은 나에게 프라하 성을 비롯한 유럽의 작은 마을들에서 본 정경들의 강렬한 영상들은 쉬이 잊히지 않는다. 프라하 성, 눈부신 아침 햇살에 그림처럼 펼쳐진 붉은 지붕들, 고풍스러운 성들의 도도하고 아름다운 자태, 집집마다 창틀마다 꽃들을 담뿍 담뿍 얹은 동화 속같은 마을들..... 물론 많은 복원작업을 거쳤을 테고 모두들 유지 관리에 공을 들인 결과이겠으나 왜 우리는 세월이 갈수록 아름답게 깊어져 가는 풍경을 가질 수 없는가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20대에 파독 간호사로 고국을 떠나 지금껏 독일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들려준 에피소드도 생각이 난다. 한국의 발전상을 익히 들어왔던 그녀가 이 땅을 떠난 후 40년 세월이 훌쩍 지나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하던 날의 감상을 들은 적이 있다. 비행기가 한국 상공을 들어서니 파란 공간들이 촘촘히 내려다 보여서, 역시 듣던 대로 이제 한국은 집집마다 수영장들을 갖추며 살 정도가 되었구나 하며 감격에 젖었는데,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니 그 푸른 공간은 수영장이 아니라 파란 칠을 한 올망졸망한 지붕이더라니 웃고 넘겨지지만은 않았다. 


가끔 자동차로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요즘 시골이란 더 이상 정겨운 시골 풍경이 아니다 싶어진다. 아름다운 해변이나 수려한 강변에 바싹 붙여 횟집을 지어야 했고, 전원 풍경은 뒤로 하고 민박에 토종닭 간판이 어지러우니, 나는 늘  말해 왔다. 왜 민박과 토종닭은 세트로 다녀야 하는가 하고. 산 좋고 물 좋은 강원도도 이제는 옛말인 듯, 온 숲은 헤집어 졌고, 알 수 없는 외국어 이름의 펜션이나 모텔은 늘어만 갔으니 말이다. 우리나라와 풍광이 비슷한 일본을 여행하면서 나는 유심히 바라 보았다. 온 산을 헐어서 식당 만들고, 여관을 만들고, 울긋불긋 간판을 매달고 있나 하고 말이다. 일본의 숲이 우리나라보다 울창했으면 했지 더 헐벗지 않았어도 간간이 보이는 휴게소가 열일을 다하고 있고 숲은 저 혼자 울울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적어도 난개발은 아니라고 보았다. 나무를 보고 산을 보았다고 하는 근시안적 시선이라 힐난한다 해도 나의 시선에는 그랬었다. 

이전 서울 시장이 중구난방식의 어지러운 간판을 정비를 한다고 하여 마음으로 굉장히 공감한 기억이 있다. 일정한 규격의 간판을 바꿔 단 상가 건물은 얼마나 간결하고 세련돼 보였는지! 도시의 기능과 미관을 위한 연구와 노력은 아무리 해도 넘치지 않을 것 같다. 건물도 집도 사람도 오래가는 멋을 지녔으면 좋겠고, 오래 갈수록 멋이 더해졌으면 좋겠다 싶다.

우리 젊은 시절은 아파트에 살기를 모두들 소망했던 시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따뜻하고 시원하고 또 눈비에 대비해서 일손도 줄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어딜 가나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아파트가 출몰하는 아파트 공화국 시대를 살고 있으니 다 옛말이겠지만. 요즈음 나는 이사를 앞두고 있어 집수리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집수리에 관심 가져 본 세월도 오래됐고 해서 요즘 트렌드와 변화를 알아보겠다고 인터넷이며 뭐며 뒤적이다 곧 싫증이 나버렸다. 그 집이 그 집인 것이 트렌드여서 아이디어가 떠 오르지 않고, 미술관을 방불케 하는 빛나는 실내 디자인이 사람을 작아지게 하는 것 같기도 해서이다. 우리가 사는 집은 우리만의 가치가 있었으면 하는 막연한 생각에 주먹구구로 연구하다 보니 멋진 것과 거리가 점점 멀어진다. 이러저러한 궁리에 빠져 있는 이 즈음에 시의적절하게 손녀가 이 책을 읽게 하여 생각이 갈피를 좀 잡는 것같다. 뭐든 다 잘하는 우리 세영이에게 건축가도 멋있을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