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서 책을 추천받거나, 책을 나눠 보는 일이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다. 지인이 'Hillbilly Elergy' 라는 제목도 생소한 책을 건네 주어 고맙게 받아 들었는데, 읽으면서 기대 이상의 울림이 있어 나도 누군가에게 권하고 싶어졌다.
'힐빌리'란 미국의 쇠락한 공업 지대인 러스트벨트 지역에 사는 백인 하층민을 지칭한다. 소외된 지역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대체로 교육 수준이 낮고 가난하며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저자 'J.D. 밴스'는 '러스트벨트'에 속하는 오하이오주의 미들타운에서 태어나 켄터키주 남동부의 탄광촌인 잭슨을 오가며 자란 힐빌리의 자손이다. 저자는 폭력과 약물이 넘실대는 우울한 환경을 딛고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해 변호사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이 책은 최하층민의 신분에서 상류사회에 진입하게 된 자신의 성장과정을 그린 자전적 얘기이다. 이 소년의 성장 스토리에서 미국 사회의 명(明)과 암(暗)을 보기도 하지만 가족 사랑과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의 힘을 보기도 하여 누구나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저자의 할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보다 나은 환경을 찾아 주기 위해 켄터키를 벗어나 일자리가 좋은 공업지대인 이 곳으로 이주하였고, 안정된 직장생활로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역의 산업기반이 차츰 침체해져 갔고, 할아버지가 다니던 '암코가와사키'라는 큰 회사도 문을 닫았다. 집값이 떨어지고 상점과 주택은 버려진 채 방치되어 마약 중독자와 밀매상의 접선 장소로 악용될 정도로 피폐해져 갔다. 1980년대 공업도시로서의 영광은 찾아볼 수가 없이 고립되면서 가난의 섬이 된 것이다.
이 도시의 현실에 젖어 든 저자의 엄마는 일관되게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아들의 성장에 막대한 악영향을 안겨 준다. 이 지옥 같은 일상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자를 보호하고 미래를 생각할 틈을 만들어 준다. 할머니의 집은 위험하면 언제나 뛰어 갈 수 있는 피난처였고, 할머니는 커다란 울타리였다. 그래서 저자는 가난한 사람의 인생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물질적, 정신적 빈곤이 자녀에게 어떤 심리적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썼다고 말한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저자가 읊었던 말은 모든 상황을 함축한 것으로 할아버지에게 바치는 사랑과 존경을 보여 주었다.
“제게는 아빠가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엔 언제나 할보(할아버지의 애칭)가 있었고 할보는 제게 남자가 알아야 할 것들을 가르쳐 줬어요.” “할보는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한 최고의 아빠였습니다”
“부모님과 나의 관계는 좋게 말해서 복잡한데, 엄마는 거의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껏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를 키워 준 외조부모님은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았고, 친척들까지 포함해도 우리 집안에서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거의 없다 < p. 22 >
남편감을 끝없이 갈아치우고 약물에 의존하던 엄마가 아동학대 혐의까지 받게 되어 끝내는 아들의 양육권이 박탈될 위기에 처하였고, 아들은 어쩌면 위탁가정의 손에 맡겨져 자신이 집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위기의 순간에 할머니는 손자의 양육을 자청한다. "누구보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할머니이고, 이곳은 너의 집이니 돌아 올 마음의 준비만 되면 언제라도 이곳으로 돌아오라!". 엄마를 피해 수시로 들락거리던 할머니의 집에 입주하면서 처음으로 일상에 평화를 얻게 된다. 자동차며 뭐며 수리를 잘하는 할아버지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수학을 배워 공부를 알아갔고, 사격을 배운 덕에 훗날 해병대에서 출중한 사격수가 되기도 했다.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아갔고, 12학년이 끝나갈 무렵 할머니와 단 둘이 살게 되면서 완전히 공부에 몰입하게 됐다. 할머니는 사납고 과격하면서 의리를 중시하는 강한 개성을 지녔지만 손자에게는 더없이 강력한 보호자가 돼 주셨다. 배움은 없어도 마음에 와 닿는 이치로 손자를 깨우치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가족들이랑 주말을 보내게 해주는 직장에 취직하려면 대학에 가서 출세해야 한다” < p. 249 >
할머니의 지지에 힘입어 공부에 전념했고, 마침내 오하이오 주립대학에 합격했으나 입학을 미루고 매력을 느끼던 해병대에 지원하게 된다. 이라크 전쟁 중인 시기여서 이라크에서 복무하기도 했으며, 이 모든 힘든 과정을 지극히 모범적으로 해낸다. 전역 후에는 다시 오하이오 주립대학에 입학하여, 공부와 시간제 알바이트를 병행해 가며 초인적인 노력으로 1년 11개월 만에 최우등으로 대학 과정을 마치는 실로 놀라운 쾌거를 이룬다. 인간승리라 할 이 유례없는 성취에도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고 최고의 명문 예일대학교 로스쿨의 문을 두드렸고. 마침내 입학 허가를 얻게 된다. 가난한 자는 꿈도 꿀 수 없다는 이 로스쿨의 문을 가난의 힘으로 넘어선 것이다. 저소득층의 진출을 위한 전형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을 움직이는 유연한 시스템과 강력한 힘을 보았다고 하고 싶다.
저자의 서술에는 새겨들을 부분이 아주 많다. 모든 것에 불만이 가득하던 자신을 바꾼 건 이라크 파병 시절 이후였다고 한다. 수돗물도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해맑게 웃고 즐거워하는 전쟁터의 아이들을 바라보며 자신은 지구 최강국에서 태어나 문명의 이기를 누렸고, 다정한 두 노인의 지지를 받으며 자랐다는 것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할머니와 자기는 두 개의 신을 모시고 사는데 그 하나는 그리스도요 또 하나는 미합중국이라고 말할 정도로 조국의 존재에 감사하는 지점도 인상적이다.
“나는 최악의 순간에 느낄 수 있는 두려움과 최고의 순간에서 느낄 수 있는 안정감 사이를 오가며 평생을 보냈다." < p. 277 >
"내가 누리는 인생이 실로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돌이켜보면 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 < p. 312 >
가난한 흙수저 태생으로 부와 풍요의 극점인 미국의 상류 사회로 급격하게 신분상승을 이룬 사람은 말하자면 완전히 이질적인 세계로 이주한 문화적 외래인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래서 이 두 부류 인간군의 차이점을 뼈저리게 느꼈고 부자들은 노동계층의 사람들과 분명 다른 자기들만의 규범과 습관을 가지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 두 사회의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짚어 보여 주는 것이 굉장히 설득력이있다. 돌이켜 보면 자기가 성장하던 당시의 미들타운은 비이성적 사회였다고 비판한다. 운이 좋으면 기초 생활 수급자 신세를 면하는 것이고 운이 나쁘면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절망을 절망인 줄 모르는 사회에 분노를 느낀 것이다. 가난한 살림에 거대한 텔레비전을 사고 아이패드를 사는 등 지출을 늘리고, 이자가 높은 신용카드나 고리대금을 얻어 자식들에게 비싼 옷을 사 입히고, 집을 사서 재융자를 받고 또 받다가는 마침내 파산신고에 이르기도 하는 식의 생활 습관이 온당치 않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다.
요리를 해 먹는 편이 심신의 건강에 좋을뿐더러 가격도 더 저렴한데도 우리는 거의 요리를 하지 않는다. <. p. 247 >
슬프고 가난한 마을에 가난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었다고 회고한다. 기초 생활을 유지할 정도의 복지에 의존하여 게으르게 살며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 모든 불편은 사회나 제도 탓으로 돌리면서 일자리를 찾아 나서지 않는 사람들, 일자리를 구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해고당하거나 그만두면서 부당한 대우 때문에 못해먹겠다고 해대는 사람들, 자기의 태만함을 합리화하면서, 실업수당이나 복지에 의존하려 드는 사람들,그래서 복지 혜택으로 무난히 살아가는 요령을 터득한 복지여왕이 속출하기도 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보낼 비용을 어떻게 마련할지 걱정하는 세상에서 자랐다. 그리고 지금은 부자와 특권층이 지역사회의 빈곤층에 아낌없이 베풀 기회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분수에 넘치는 쇼핑을 하며 통장을 다 털고 환급받을 세금까지 따져서 미리 쓰면서 맞이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크리스마스와 책을 선물 받거나 불우한 이웃을 위해 기부를 아끼지 않는 부자들의 크리스마스와의 극명한 대비를 말하는 그의 서글픔이 행간에 충격으로 읽혀졌다.
쇠락한 미들타운이 환골탈태하려면 주변에 귀감이 될만한 좋은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들과 교류하며 건강한 인생을 배우고 선하게 영향을 받으면 세상을 보는 시야도 달라질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경제학자들이 인맥을 사회적 자본으로 매기듯이 인맥이 실질적 자산이니 좋은 사람을 가까이 두라는 조언일 것이다.
사회보장 제도가 양산하는 게으른 사람들, 의존적인 사람들의 현실을 보면서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는 옛 어른들의 말이 생각난다. 20세기 초 경제 선진국이었다는 아르헨티나, 요즘 신문 지상을 우울하게 장식하는 베네수엘라 등 지나친 복지로 인해 열등국가로 전락한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이 말을 증명해 주니 옛 말이 바로 진리라는 생각이 든다. 오바마 대통령이 읽어 이 책이 전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데 미국의 현실이 아니더라도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 나름의 성찰을 하게 할 것이라 여겨진다.
비록 한 개인이 이룬 성취의 서사이긴 하지만 이 책에서 우리는 미국 사회의 민 낯도 보았고, 시스템이 굴러가는 나라라는 인상도 받는다. 가난하게 사는 사람에게 기초적인 삶은 보장해 주는 나라, 법과 원칙을 준수하는 나라, 이에 더하여 무엇보다 노력하는 가난한 수재에게 전액 장학금을 수여하며 육중한 문을 열어 주는 예일대학교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약점을 강점으로 키워가는 역동적인 반전을 보았고, 미국을 강력하게 받치고 있는 힘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도 같았다.
저자가 경제력이 생기면서 할머니에게 매월 300불을 지원하고, 귀향하여 할머니와 누나의 가족들과 친척들을 식사에 초대하여 느낀 기쁨에도 공감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산 밥을 먹고 행복해 할 때의 감동은 말할 수 없이 벅차더라는 것이다. 보살핌을 받다가 누군가를 보살피게 될 때의 보람된 감정을 경험하고 나면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된다는 말이 진실되고 교훈적으로 들린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노력하는 자에게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준비돼 있다는 예를 본 감동으로 책을 덮었다. 아울러 힐빌리의 삶을 거부하고 가난의 복판을 가르고 나와 세상에 우뚝 선 의지의 한 소년이었던 분에게 존경심을 보낸다.
삶에 임하는 자세, 사회를 바라 보는 이성적인 시선, 그 무엇보다 나는 배움을 향한 무한 도전과 그에 따른 극한의 인내를 높게 보아, 미국에 사는 외손주들에게 일독을 권했다. 말 잘 듣는 아이들은 책을 읽었고, 어려움을 겪었다는 후문에 아연실색!
"엄마! 이 책이 할머니가 추천한 책 맞아? 아닌 것같아. 이 할머니는 욕설을 너무 많이 해!"
힐빌리의 할머니는 마구 욕설을 해댔던 모양. 번역본을 본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