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시(詩) 모음 43

성장

성장 이 시영 바다가 가까워지자 어린 강물은 엄마 손을 더욱 그러진 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거대한 파도 속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다 엄마 손을 아득히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 잘 가거라. 내 아들아. 이제부터는 크고 다른 삶을 살아야 된단다. 엄마 강물은 새벽 강에 시린 몸을 한번 뒤채고는 오리처럼 순한 머리를 돌려 반짝이는 은어들의 길을 따라 산골로 조용히 돌아 왔습니다.

쨍한 사랑 노래

쨍한 사랑 노래 황 동규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 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 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줄 처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떠도는 자의 노래

떠도는 자의 노래 신경림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메고 다닐지도 모른다.

번짐

번짐 장석남 (1965~)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 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온다

율포의 기억

울포의 기억 문정희 (1947~)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득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 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無爲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화살과 노래

화살과 노래 HW 롱펠로_ 공중을 향해 화살 하나를 쏘아 올리니 땅에 떨어졌네 내가 모르는 곳에, 빠르게 날아 가는 화살을 내 눈이 따를 수 없었기에, 공중을 향해 노래를 부르니 땅에 떨어졌네 내가 모르는 곳에. 누가 그처럼 강하고 예리한 눈을 가져 날아가는 노래를 따를 수 있으랴.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어느 떡갈나무에서 그 화살을 발견했네 부러지지 않은채로 그리고 온전한 그대로 그노래를 한 친구의 가슴속에서 다시 찾았네. - 장영희 譯 무심히 내뱉은 말이 남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히기도 하고, 또 내 말 한마디에 힘입어 넘어졌던 사람이 다시 용기를 갖고 일어나기도 한다. 그만큼 내가 지금 하는 말은 그냥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슴에서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 노래하는 마음, 시를 쓰는..

만약 내가

만약 내가- -에밀리 디킨슨-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만약 내가 누군가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다면, 혹은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혹은 기진맥진 지친 한 마리 울새를 둥지로 되돌아가게 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은 아니리. 장영희 譯 네 가슴 숨은 상처 보듬을 수 있다면... 그토롤 귀한 생명받아 태어 나서 헛되이 살다 갈 것인가 누군가 나로 하여 고통 하나를 덜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