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2015년

쎄시봉 공연, '순수 시대의 초대장'

수행화 2015. 3. 27. 00:37

 

 

나는 가수나 배우들의 광팬이 되어 본 적도 없고, 누구에게 열렬하게 지지를 보내 본 적도 없다. 그렇지만 쏘프라노 조 수미, 가수 패티 김, 조 영남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좋아라 한다. 내 취향을 눈치챈 아들이 티켓을 마련해 주어 나는 조 수미의 화려하고 장엄하던 공연도 보았고, 패티 김의 성의 있는 공연도 즐겁게 보았는데 이번에는 '쎄시봉 공연'까지 보게 되었다. 지난 3월 14일 '성남 아트센터'를 시작으로 '2015 쎄시봉 전국투어 콘서트'가 열린다고 했으니 이 투어의 첫 번째 공연을 보게 된 것이다.  

출연 가수는 김 세환, 윤 형주, 조 영남이었고 이 상벽 씨가 재담을 보태며 즐겁게 공연을 이끌었다. 모두들 너무 낯 익고 친근해서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지인을 만난 것 같았고, 더 놀라운 것은 아직도 그들은 '젊은 그들'이었다는 것이다. 과연 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연배로서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란 말인가? 자칭, 타칭 막내라고 부르는 김 세환은 48년 생이고, 윤 형주 47년생, 조 영남이 45년 생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말이다. 청춘은 인생의 어느 시기가 아니라 열정이라는 시인의 말이 저절로 떠 오르는 순간이었다. 유 관순 언니가 우리에게 영원한 언니이듯, 그들도 우리에게는 영원한 청년으로 남아 있을 것같다. 여전히 청바지가 잘 맞으니 그렇고, 기타 튕기는 손 동작들이 현란하고 멋진 것이 그렇고, 농담 같은 대화가 흉허물 없이 넘나드는 양이 소년들 같으니 그럴 것만 같다. 그들의 시계는 1970년 당시에 고정되어 버렸다고 말하고 싶다.

검게 그을린 김 세환씨의 미소에서 미소년의 모습을 보았고, 반듯한 윤 형주 씨는 유머 감각이 퍽 돋보였으며, 조 영남 씨의 익살은 그의 노래만큼 청중을 사로잡으면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각자의 개성을 드러냈다. 진정 클래식이 된 노래들과 더불어 그들은 우리 시대의 한 전설로 영원히 인구에 회자할 것이다. 조 영남씨가 쎄시봉에서 처음으로 불렀다는 노래는 직접 피아노까지 쳐가며 불러 역사적 사실을 재현했고, 윤 형주 씨가 만들어 유통시켰던 무수한 CM 송들을 한 데 엮은 것은  마치 한국 CM송의 진화를 한 눈에 보는 것같아서 윤 형주씨는 이 쟝르에서 일련의 변천사를 엮어가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그들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걸 느꼈다. 
'할아버지의 시계', '향수''..... 음악은 그 아름다운 습기로 우리 마음의 저 메마른 구석을 적셔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잊힐 리 없는 우리 젊고 순수했던 날들에의 초대장이었다.

음악 환경이 변변치 않았던 시절 탓인지, 우리 세대 정서를 대변할 무엇이 없어서였던지, 막연한 동경이었던지, 어찌하였거나 우리 젊은 날에는 우리 가요보다 외국 팝송에 더 많은 애정을 보내며 지냈다. 그런 시절, 1969년 아니면 70년?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조 영남의 '딜라일라'는 실로 신선한 충격이었고 파장이 엄청났었다. 나로서는 Tom Jhons 의 원곡보다 조 영남의 노래가 더 듣기가 좋았다. 나 홀로 판단하고, 혼자만 듣던 편향된 음악 감상 스타일에 이 노래는 적잖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후 지금껏 우리 가수 중, 유독 조 영남 노래를 좋아하고 있다.
당시 나는 지긋지긋하게 자주 아팠으며, 꼼짝 없이 누워 지내는 날들이 그렇게 많았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라디오 듣기, 책 읽기. 레코드 판 사 모으기. 그리고 월간 여성지 받아 보기가 고작이었다. 이렇게 낙오되고, 곧 추락할 것만 같은 두려움과 절망감에 살았고, 문화적 갈증이 주는 불만에 시달렸다. 이런 내  현실의 배경에 음악은 영혼의 구원이었으며, 위축된 마음에게 보낼 수 있는 위로의 행위였었다. 그로서 자존감을 회복하고, 나를 사랑하게 되기를 소망했던 것 같기도 하다.  

 라디오에서 소개되는 클래식 음악들은 레코드판을 사서 밤을 새워 거듭 들었으며, 음악 감상서를 사서 드문 드문 펼쳐 보면서 이해를 도와 보기도 하는
'음악 감상 홀로서기의 시대'  혹은 '내 음악 감상 분투기'?
그렇게 표현하고 싶으리만치 추상적이고 어쭙잖은데도 나는 몹시 몰입을 했던 것 같다. 그 단조롭던 시간 속으로 세시봉 친구들의 노래와 그들이 번안해서 불러 주는 외국 가수들의 팝송이 스며들며 편안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근사했고, 문화의 메신저로서, 즐거운 인생의 조력자로서 역할을 얼마나 톡톡히 했던지. 회상해 보니 정말 참신한 일이었다.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오직 빛뿐'  
마음에 드리운 어두운 장막을 걷어내는 빛으로서, 삶의 답보와 정체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절박한 욕구에 음악과 책은 일정한 몫을 했던 것 같다. 음악과 더불어 끊임없이 받아 보는 여원, 여성 동아, 여상 등 잡지들이 일상의 벗이었고, 그 벗에게서 나는 나를 일으키는 동력을 얻으며 위안을 삼았던 것이다. 훗날 배우가 된 문 희, 윤 정희 씨가 잡지 표지 모델이 된 것을 보던 시절, 박 완서 씨의 첫 장편 소설 '나목'이 여성 동아 별책 부록으로 따라와 읽었던 기억들이 단편적으로 떠오르며 내 생각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것은 한편, 내가 누리는 사치였으며, 아울러 내 20대의 초상이었다. 밤낮없이 열심히 실을 뽑아 스스로 갇힐 집을 만드는 누에의 일상, 자기가 지은 집에 자기가 갇히고 마는 누에의 노고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나 나는 열심히 실을 잦으며 나를 가두어 갔던 시절이었다,

 

그 시기에 내가 "딜라일라" 레코드판을 산 것이다. 테너 마리오 란자, 팻분, 냇킹 콜. 마리안 앤더슨. 그리고 비틀스 등의 레코드 판을 사긴 했어도 우리나라 가수의 노래로는 조 영남 씨의 '딜라일라'가 처음이었으니 내게는 퍽 예외적이고 기특한 역사가 되는 것이다.
얼마나 자주 들었으면 그때 말을 막 배운 조카 -정 재훈- 는 딜라일라 노래를 따라 부르며 놀았다. '밤 깊은 골목 길 그대 창 문 앞 지날 때, 창~문에 비치는 희미~는 두 그림자~~~~~' 특히 "창문에" 부분에서 창, "희미는" 의 부분에서 희에 강세를 두면서 따라 불렀고, '희미는'이란 표현은 지금도 생각만 하면 웃긴다.
멋들어지게 따라 부르고는 나더러 "나도 이제 전축 안에 들어가도 되겠다"라고 자랑까지 하곤했던 행복한 기억은 이 노래를 늘 따라 다닌다. 그 노래를 시작으로 내 음악 감상의 딱딱하고 꽉 막힌 방법에 조금 유연성이 생겨, 우리 가수들의 노래에 귀를 여는 융통성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어쩌면 쎄시봉 멤버의 노래를 만나게 될 우연같은 필연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쎄시봉 음악은 나와 함께 지금에 와 있다.

나를 위해 헌신했던 날들은 가고, 결혼과 육아와 스트레스로 인해 자아 상실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이윽고 내 음악 애호의 세월은 짧게 막을 내렸고, 이후 '음악 감상의 긴 암흑기'로 접어들었다고 회상하곤 한다. 나는 늘 암흑기라 칭한다. 그렇게 내 감성이 사그라지는 것이 잘 보이던지 아들은 카셋트도 선물해 주고, cd도 사다 주고, 가끔 공연을 보시겠냐고 묻기도 하는 현실에 감사하게 되니, 슬펐던 날과도 화해하고 함께 추억하게 되는 것이다.

 그 세월에 내가 사다 모았던 레코드판들은 훗날 아이들 장난감도 되고, 학교 과제물로 쓰이기도 하면서 함부로 굴렸고, 거추장스러운 물건이 되어 버렸었다. 그렇지만 유용하게 쓰인 기억이 하나는 떠 오른다. 아들이 초등하교 1학년 당시 아침에 음악을 들려주는 시간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께서 집에 '숲 속의 대장간' 레코드판 있는 사람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셨나 본데 아들이 자기가 선뜻 가지고 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실은 그 레코드판은 함부로 굴린 탓에 가장자리가 조금 잘려 나가고 금이 갔었던지라 너무 난처해서, 나는 곧바로 학교로 달려가 담임 선생님께 사정이 이러니 좀 더 깨끗하고 좋은 것을 구해 보시라 말씀드렸는데,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걸 가지고 있는 집을 잘 못 봤어요."
그래서 그 가장자리가 갈라져 낡은 판이 아침나절 학교에 울려 퍼지며 전교생이 들었을 생각에 참 민망하면서 한편 흐뭇하기도 했던 일이었다. 40년 전 우리의 일상이 그저 그랬나 싶다. 
음악이 넘쳐 나고, 음원이 넘쳐 나고, 가수가 넘쳐 나는 지금 이 시대엔 상상마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즐거운 추억과 서글픈 기억들이 공연 내내 사이 좋게 넘나 들었다. 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조 영남과 그의 쎄시봉 친구들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눈앞에서 바라본다는 사실에 나는 정연한 자유를 느꼈다. 관념을 떠난 자유를, 실마리가 풀리며 누에집을 벗어나며 빛을 구가하는 누에의 마음같은, 그런 자유를.
"언덕에 홀로 서서 눈물로 흔들어 주던 하얀 손수건~~~~"
고향을 떠나 올 때 눈물로 흔들어 주던 손수건은, 떠나보낸 젊음에게 흔들어 주던 눈물의 손수건일 것이리니!
우리와 함께 나이가 들었으며, 영원한 클래식이 될 그들의 노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리듬은 세월 속에서 더 깊어질 것이며 언제까지 우리 곁에 머물 것이어서, 사랑과 지지를 내내 아끼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는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라고 하면 절대 안 가겠다고 했다. 지긋지긋한 고생이 떠 올라서 싫다고들 했다. 그러나 나는 이전의 세월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진정 다시 돌아가고 싶다. 좀 더 정밀하게 시간을 재단할 것이며, 다채롭고 싱그러운 세상에 두려움 없이 나를 던지고 싶기 때문이다. 

공연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함께 부르면서 마치게 되어 있었다. 우리 모두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수 많았던 '우리들의 이야기'를 추억했고, 노래했고,
"언제라도 난 안 잊을 테요. 언제라도 난 안 잊을 테요"
다짐으로, 그 젖은 마음으로, 언제라도 안 잊힐 추억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면 되는 거였다. 진정 젖어든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