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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김기택 방금 딴 사과들이 가득한 상자를 들고 사과들이 데굴데굴 굴러 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 그녀는 서류뭉치를 자르고 있었다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고층 사무실 안에서 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빛깔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은 사과들을 사과 속에서 핏줄처럼 뻗어 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 스스로 넘치고 무거워져서 떨어지는 웃음을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사과를 나르던 발걸음을 발걸음에서 튀어오르는 공기를 공기에서 터져나오는 햇빛을 햇빛 과즙과 햇빛 향기를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지금 디딘 고층이 땅이라는 것을 뿌리처럼 발바닥이 숨쉬어온 흙이라는 것을 흙을 공기처럼 밀어올린 풀이라는 것을 나 몰래 엿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웃음을 그녀의 내부에서 오랜 세월 홀로 자라다가 노래처럼 저절로..

Alchemy

Alchemy Sara Teasdale I lift my heart as spring lifts up A yellow daisy to the rain; My heart will be a lovely cup Altho' it holds but pain. For I shall learn from flower and leaf That color every drop they hold. To change the leafless wine of grief To living gold 연금술 사라 티즈데일 (1884~1933) 봄이 노란 데이지꽃 들어 비 속에 건배하듯, 나도 내 마음 들어 올립니다. 고통만을 담고 있어도 내 마음은 예쁜 잔이 될겁니다. 담겨 있는 방울방울 물들이는 꽃과 잎에서 나는 배울테니까요.생기 없..

새는 날아 가면서 뒤돌아 보지 않는다

새는 날아 가면서 뒤 돌아 보지 않는다. 류시화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 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사람의 가을

사람의 가을 문정희 나의 신은 나입니다. 이 가을날 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 내가 나의 신입니다 별과 별 사이 나와 너 사이 가을이 왔습니다 맨 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 자르고 잘라서 모든 것은 홀로 빛납니다 저 낱낱이 하나인 잎들 저 자유로이 홀로인 새들 저 잎과 저 새를 언어로 옮기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 이 가을 산을 옮기는 일만큼 힘이 듭니다 저 하나로 완성입니다 새, 별, 꽃, 잎, 산, 옷, 밥, 집, 땅, 피, 몸, 물, 불, 꿈, 섬 그리고 너, 나 이미 한편의 시입니다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입니다. 이 가을날 모든 존재는 소외된 개별자가 아니라 충만한 단독자로 빛난다는 것 가을은 인간 존재가 충만한 단독자임을 일깨우는 계절이라는 시인의 생각

늘, 혹은

늘, 혹은 조병화 늘, 혹은, 때때로 생각 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 늘, 혹은, 때때로 보고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카랑카랑 세상을 떠나는 시간들 속에서 늘 혹은 때때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그로 인하여 적적히 채워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까이, 멀리, 때때로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라도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명확한 확인인가. 아...그러한 네가 있다는 건 얼마나 따사로운 나의 저녁노을인가.

성장

성장 이 시영 바다가 가까워지자 어린 강물은 엄마 손을 더욱 그러진 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거대한 파도 속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다 엄마 손을 아득히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 잘 가거라. 내 아들아. 이제부터는 크고 다른 삶을 살아야 된단다. 엄마 강물은 새벽 강에 시린 몸을 한번 뒤채고는 오리처럼 순한 머리를 돌려 반짝이는 은어들의 길을 따라 산골로 조용히 돌아 왔습니다.

쨍한 사랑 노래

쨍한 사랑 노래 황 동규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 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 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줄 처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