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222

'체링크로스 84 번지'를 아시나요?

가을에 잘 맞는 간결한 책을 한 권 읽었다. 오직 편지만으로 이어진 20년의 인연, 아주 특별한 만남, 체링크로스 84번지는 런던의 마크스 & 코’라는 한 헌 책방의 주소이다. 1949년에서 1960년까지 20년간 한 도서 구매자와 서점 직원이 주고 받은 편지를 모아 엮은 특이한 소재의 책이다. 뉴욕의 헬렌 한프라는 작가는 고서적에 취미가 많은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며 체링크로스 84번지 서점으로 작은 주문의 편지를 띄운다. 서점 직원은 주문에 정중하게 답장을 띄웠고, 그 사연은 이후 20년 간 지속되었던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의 일에 충실할 뿐인, 퍽 평범한 사연으로 자칫 싱거워 보이나 정겹고 따스하다. 짧은 인사와 함께 보내는 도서 주문서. 청구서와 함께 잔액을 일러 주는 성의 있는 상업적..

노트북/2009년 2012.12.03

르노아르 (Auguste Renoir : 1841-1919) 미술전

긴 방학이 다 잦아든 즈음에 아이들과 시간을 맞추어 르노아르 전시장을 찾기로 했다. 세기적인 명화가 우리에게까지 찾아 와서 발품 조금 팔면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인데 놓쳐서는 아니 될 일이나 그게 퍽 맘 같지가 않은 데... 아이들 손잡고 가족 나들이 삼아 나서니 아니 즐거울 수가 없다. 르노아르의 그림은 우리에게 이미 친숙하고 많이 보아 온 터이나 화가의 손놀림을 바로 앞에서 생생하게 느끼며 보는 것은 또 다른 감동이다. 마치 어떤 종교 의식에 참석한 듯 엄숙해지면서 사뭇 경외감이 생기는 것은 나만의 기분인 것인가? 책 읽는 모습, 바느질하는 모습, 피아노 치는 모습, 춤추는 모습, 목욕 하는 모습, 소풍의 모습 등. 이 모든 우리들의 일상은 보는 시각에 따라 다 아름다운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걸..

노트북/2009년 2012.12.03

신 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며칠 전 조간에 배우 박 중훈의 인티뷰 기사가 크게 실렸다. 그가 상당히 지적이고 또 퍽 유머러스한 배우라고 알고는 있었는데... 최근 개봉한 영화 “해운대”의 시사회를 기상청에서 가졌다는데 그 자리에 참석한 그가 기상청 직원들 앞에서 했다는 말이 퍽 마음에 와 닿는다. “기상청은 어머니입니다. 잘 하면 안 보이고 한 번 못하면 확 표시가 나니까요” 윗트 넘치는 표현에 모두들 박수를 보냈단다. 어머니에 대한 우리의 무심한 정서를 너무 잘 표현해 주어 웃으면서 한편 씁쓸한 뒷 맛이 있다. 얼마 전 장안의 화제작이고, 낭독회에까지 인파가 몰리면서 은근히 엄마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읽은 느낌과 별반 다르지도 않은 것이다. 작가 신 경숙은 애초에 어머니로 글을 시작했는데 실마리가 영 ..

노트북/2009년 2012.12.03

냉정과 열정 사이

일본 작가 ‘조지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가 한 작품을 릴레이 형식으로 쓴 특이한 형식의 소설이다. 제목이 일단 멋지고 책이 청 홍의 두 권으로 엮어져 있어 외양이 우선 색다르고 귀염성스럽다. 우리네 여고 시절에 가정교사. 설국, 빙점 등 일본 소설을 눈물을 흘려 가며 밤 새워 읽었던 기억을 떠올려 가며 읽었다. 일본 작가에 대해 별 아는 바가 없는데 공지영이 쓴 소설-사랑 후에 남는 것(?)-과 분위기가 약간 닮았다는 느낌이 설핏 드는, 청춘의 찬가 같은 소설이다. 젊은 시절의 사랑은 시간의 파도를 타고 먼 길을 우회하다가 어느 날 우연처럼 다시 다가온다는 인연을 그린 것인데 밀라노와 피렌체, 일본의 공원 등...도시와 사람을 잔잔하고도 섬세하게 그려 나가고 있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씌어진 글처럼..

노트북/2009년 2012.12.03

산티아고 가는 길

도보 여행가 김 남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위에서 썼다는 글이다.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런 여자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는 부제는 너무 겸양의 표현이거나 혹은 독자가 겁부터 먹지 않게 하려는 배려에서 일까? 스페인 태양에 붉게 달구어진 길을 30일 이상 순전히 걸어서, 그것도 34세의 여자 혼자 나선 용기가 벌써 범상하지 않은데 붙여진 이름이 소심한 듯하다. 순례 기행문은 하루의 일정과 감상을 써 내려 간 일기 형식이나, 매일의 동선에 따라 이동 거리와 그날의 지출까지를 가계부 쓰듯이 착하게 기록해서 산티아고 순례의 길라잡이로서 충분한 정보와 감동을 꼼꼼히 전해 준다. 간간히 끼워 진 사진으로 순례 길의 아름다움과 고독을 함께 읽게 해 주고, 무엇보다 담담하나 생생하고 때로 촉촉하게 자기의 감정..

노트북/2009년 2012.12.03

헤르만 헷세(Herman Hesse), ‘정원 일의 즐거움’

“정원의 여름이 그토록 황급히 왔다가 간다는 사실은 놀랍고 걱정스럽다.정원에서는 생명체의 덧없는 순환을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분명하고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시들고 썩고 사라진 하찮은 곳에서 죽음을 뚫고 새싹들이 솟아오를 것이다. 자연의 순환은 단순하고 명징하다. 정원에서 생명체의 순환을 다른 곳에서보다 분명하고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지난해의 죽음에서 양분을 얻어 소생하지 않는 여름은 없다, 모든 식물은 흙에서 자라나올 때 그러했듯, 역시 묵묵하고 단호하게 흙으로 돌아간다. 이 같은 사물의 순환에서 우리 인간만이 제외 되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가. 사물의 불멸성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번 뿐인 인생인 양 자기만의 것, 별나고 특별한 것을 소유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기이하게만 여겨지는 것이다.(19..

노트북/2009년 2012.12.03

백번의 거절

‘100번이나 불합격 통지를 받은 당신에게’ 얼마 전 조간에서 읽은 칼럼의 제목이다. 재미 작가 김 민진 씨의 글이었는데 우울한 기사들이 지면을 껌껌하게 채우고 있는 가운데에 오롯한 한 줄기 밝은 기운을 주는 글이었다. 소설가 지망생이던 작가는 참으로 많은 글을 써서 출판사로 보냈는데 돌아오는 건 거절의 편지 뿐 이었다고 말한다. 거절은 비단 소설만이 아니어서 수필, 연구지원서, 저작권 협상안...등등, 헤아릴 수 없었으니 크나 큰 상처를 입었으며. 끝없이 계속되는 거절을 겪으며 마침내 그녀는 좌절했고, 분노와 모욕감으로 고통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자신감이 완전히 바닥이 난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자기를 일으킨 언니의 말 두 마디, “첫째는 계속 거절당하는 게 안됐다." 두 번째 말, "나가서 100..

노트북/2009년 2012.12.03

영원한 문학 소녀, 장 영희 교수를 기리며

비 내리는 아름다운 5월 아침. 영원한 문학소녀 장영희 교수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기다리면서 나중에 만나”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사흘에 걸쳐 힘들게 엄마에게 편지를 남기고. 나는 마치 아끼는 여동생을 잃은 듯 슬프고 아까운 마음에 가슴에 싸한 통증이 왔다. 나와 어떤 인연을 가진 것도 아니고 평범한 한 애독자일 뿐인데 말이다. 장애를 넘어 학문에 매진하고 꿈을 이룬 그녀를 늘 존경하던 가운데 몇 년 전 신문에 연재 되던 “장영희의 영미시 산책”을 읽으며 나는 점점 그녀를 좋아하..

노트북/2009년 2012.12.03

'규영'이의 친구관

"................... 그게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모둠에서 나가면 좋겠다는 친구를 집어 보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게 친구를 버리는 것이라 생각되어서 친구를 집지 않았다............. 난 친구가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친구는 내가 아프거나, 힘들 때 가방도 들어 주고 잘 위로해 주고 나에게 소중한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난 친구들이 괴롭히고 놀리고 피해를 줘도 다른 친구를 절대로 괴롭히거나 피해를 주고 놀리지 않겠다. 왜냐하면 친구를 사랑해야 착한 어린이가 되기 때문이다. 피해를 주고 괴롭히고 놀리면 그 소중한 친구도 없을 테니깐 말이다. 친구가 아프면 친구가 없더라도 또는 안 보여도 친구를 위로해 주고 마음의 편지를 보내야 친구가 좋아하고 건강해질 거..

노트북/2009년 2012.12.03

나의 빈 손

친구가 시집(詩集)을 냈다. 시작(時作)을 하고 몇 년 전 등단(登壇)을 했으며, 또 여전히 공부하러 다니는 그녀의 열의를 내심 부러워했었다. 시를 쓴다는 단순한 사실보다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성큼 첫 발을 내딛은 용기와 자기에의 긍정이 부러운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에게 있어 시란, 몹시 흠모하나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경외감의 대상이어서, 다만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아야 한다고 여겨지는 것. 그런데 그녀는 시의 바다를 향해 닻을 올리나 싶더니, 어느 듯 수준급 항해사가 되어 이렇듯 잔잔하게 항해를 하고 있었나보다. 자디잔 일상도 촘촘히 걸러 내어 순도 높은 언어로 정성껏 다듬고, 또한 고뇌의 순간들도 정녕 아름다운 노래가 되었음을 본다. 삶의 내공이 축적 되어 시가 된 것이라는 해설자의 말에..

노트북/2009년 2012.12.03